국내 여행 ·산책

30년만에 찾은 남이섬의 가을(2)

Jay.B.Lee 2022. 11. 15. 04:22

남이섬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곳이다

한국관광을 오는 동남아 사람들에게는 더욱그렇지 않을 까.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구호에  따라 은행 나무잎을 주어 한꺼번에 날린다.

얼마나 은행 나무 잎이 많은 지 푹신 푹신 하다.

이곳 은행 나뭇잎으로 충분치 못해 서울 송파에서 신선하고 노란 은행잎을 사와 이곳에 뿌린다고 들었다.

 

눈사람 호떡이 유명한 곳.

아내가 두개를 사왔다 한개에 천원이다. 따듯한 맛에 먹을 만하다. 

 

민병도 선생 출생 10주년 기념비. 

무슨 내용인가 했다.

50년간 나무를 가꾸어온 민병도 선생을 본받아 다시 50년 ,다시 100년을  길이 길이 가꾸어 나가자는 의미로 해석한다.

 

수재 민병도 선생(1916. 1.5-2006.3.5)의 삶과 생애

 

경성 고등학교와 게이오 의숙 졸업 ,조선 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정인보"의 권고로 민족 문화 선양을 위해 을유 문화사를 설립해 많은 책들을 발행함으로써 문화유산 ,언어,문자,이름 을 찾자는 의도대로 나라의 기틀을 삼는 노력을 기울였다.

문화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뜻을 모아 해방직후 1945년 국내최초 교향악단을 창설했다.

절친인 임원식이 예원학교와 서울 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자 민병도는 계속적인 지원과 후원을 했다. 

그는 한국은행 7대 총재(1962-1963)를 지냈으며 재무부의 은행 감독원 장악에 반발하여 사직하였다.

한국은행 총재 퇴임후 제일은행장을 지냈으며 모아 놓은 급여와 퇴직금으로 1965년 남이섬을 인수하였다

당시는 시골 황무지로 비만오면 반쯤 잠기던 땅이었다.

당시 강남 개발이 논의되던 당시 강남 땅 투자를 권유받았으나 후손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수천그루의 나무를 심기시작했다.

1966년 남이섬을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였다.

천리포 수목원 설립자 민병갈(Caril Ferries Miller)과 의형제로 나무 심기에 힘썼다.

1978년 부터 18년간 이사로 재직하며 나무를 가꾸었다.

1978년에는  미술관에 대한 지원목적으로 김수근 설원식과 함께 <현대 미술관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았고 <국립 현대 미술관> 운영을 돕고 경제개발 시대의 문화예술 흐름의 빈틈을 채웠다.

이후 그랜드 하이야트 회장을 역임했고 휘문의숙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남이섬을 가꾸었다

그는 미술,음악,문학,교육,수목원예 분야에 평생 뿌리고 가꾸어 온 공로로 인정 받아 1975년 국민 훈장 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참고로 그의 조부는 조선 귀족 자작이었던 민병휘로 반민족행위자로 기록 되어있다.

  아버지 민대식은 군인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금융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조선 공로자 명감"에 실린 인물평에 따르면 용맹심을 갖춘 분투가,정력가로 묘사되어 있는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인물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민병도 선생은  실천가로 그러면에서 부친 민대식의 성격을 닮은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 안유풍은 "풍문 여자 고등학교 " 설립자였다.

 

한 사람의 생애를 바라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 답게 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후손들을 위함인지 모범 답안을 보여준 민뱡도 선생의  평범하지 않은 "위대한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민병도 선생은 진정한 애국자였으며 선구자였다.

 

화석정-휴게실이다. 의자도 있고 책들도 비치되어 있다.

남이섬에선 모든글자가 한글이나 한자나 정자로 된 필체가 없다 

모두 예술적인 글자로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렵다.

처음 보는 색의  조합 . 검은눈에 검은 귀를 가진 토끼.

정자가 눈에 익숙한  한국식의 정자가 아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모습 그대로  좋다.

민병도 선생의 이름을 딴 "수재원 "이 있고 이곳은 그분의 아들 민웅기 선생이 가꾼  "자호림"이다.-아버지의 탄신 100주년 기념숲.

 

앞 두사람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호주에서 왔다는 그녀.

"감사합니다 "발음이 정확한 것으로 보아 한국을 관광하고 있지 않고 이곳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는 것으로 추측했다.

Youth stage(젊음의 광장)

세르비아 대사의 기념 식수 혹은  2005년 베오그라드(세르비아 수도) 행사와 남이섬과 Coop 기념?

 

역발상나무

이건  충남 나문재 리조트 앞 갯벌에 놓여있던 조각과 같은 작가의 작품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새들은 바닷물 위에 떠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랑프리 대상이다.

 

중앙 숲길에 식당들이 있다 아시아인을위한 식당(퓨전 한식)이 있고 한식식당, 파스타와 피자가 주류인 양식당이 있다.

가마솥에 동네 아주머니가 찐빵을 파는 작은 가게도 있다(한개 1천원)

한식당은 겉에보기보다 안의 시설은 아주 현대식이다.

입구 대기실이 넣고 서비스는 신속하면서 친절하다.

사람이 많고 바쁨에도 노인들 편히 앉으라고 2인용 대신 4인용를 드린다 했다.

불고기 뚝백이:14,000원. 고기양이 상당히 많다

순두부.-12,000원,

순두부와 국물이 잘어울린다 맛있게 하는 집이다.

관광지여서 조금 비싸다 여기면 된다.

맛은 충분히 보장되고 양심적인 식당들로 보면 된다.

기차역.

남이섬에는 탈것들이 여러 종류 있다.

자전거, 네발 자전거, 전기 삼발이,꼬마 기차, 미니 버스( 남이섬 전체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린이용 모노레일( 중단중)이있다. 

참 가장  무섭다는 짚라인이 있다.

전에 딸이 놀러와 딸과 손자는타고 서 건너가고 사위는 겁이 많아  짚라인을 타지 못했다 한다

음악 박물관

요절한 장덕(1961-1990)-아직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

장덕의 유해는 남이섬에 뿌려졌다.

 

테네시 주립대학 실용 음악과 중퇴

당시 여성 작곡가가 없던 시절  ,대한 민국 "여성" 싱어송 라이터,작사가,작곡가,음반푸로듀서,영화 배우

아버지는< 시향>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화가였다

약물 쇼크 중독(3가지 약 동시 복용)으로 사망했다-자살이 아니다.

진미령령이 부른 " 소녀와 가로등" 이은하가 부른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모습처럼"를 작곡했다.

장현이 오빠로 '현이와 덕이'듀엣도 결성해 활동했다.

장현도 설암으로 사망했다.

 

카페 Swing은  Music 박물관에 붙어 있다 

외부 모습은 작아보이나 실내는 쾌적할 만큼 넓다.

밖에는 피크닉 테이블이 있어 물가를 바라볼수 있어 좋은 곳이다. 

우리는 단지 식사후 피곤해 휴식을 하고자 머물렀다.

커피 맛은 좋은편이다.

 Swing  cafe.밖에서 보기보다 멋진 곳이다.

남이 장군의 묘다. 

보통 이곳은 남이 장군의 가묘라 부른다.

자갈로 만든 묘에 현재는 봉분을 만들었다.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에도 남이 장군의묘가 있다 .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된 그의 묘는 사실상 어디인지 모른다는게 정설이다.

 

남이 장군(1441-1468)

어린 시절부터 남이장군의 기백부터 배웠던 우리. 

그는 무인으로 금수저 출신이었으나 출중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태종의 외손이며 좌의정 권람의 사위였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해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여진족을 정벌에 앞장섰다.

공훈을 인정 받아 26세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예종 (1450-1469) 즉위후 왕권 강화시 유자광의 역모 모함으로 예종 1년 11월 2일 능지 처참형을 받았다

400년이 지나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관작이 복직 되었다.(순조 18년 :1818년)

참으로 대의 명분과 명예를 존중하는 민족이다

예종은 수양 대군의 둘째로 의경 세자가 사망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어 직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13개월만에 사망했다.

예종은 한명회의 사위이기도 했다 

19세에 죽은 것으로 보아 독살설이 일리가 있다.

남이섬 앞의 위락 시설

남이섬에서 많은 시간을보냈고 1만보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