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양식

마블레나 젤라룻딘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의 생애

Jay.B.Lee 2014. 8. 24. 04:15

 

 

루미시집: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이현주 번역(2013.4월초판  5쇄발행 )

루미평전:나는 바람  그대는 불(안네마리 쉴멜 지음/김순현 번역 2014년발행)

"여행"

 

여행은 힘과 사랑을

그대에게 돌려준다

어디든 갈 곳이 없다면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보라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걸음맞다 변화하는 세계,

그 곳을 여행할 때 그대는 변화하리라

..............................................

 

벗이여 ,수피는 이순간의 아들이다.

'내일'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수피(SufiI):허망에서 진실로 거처를 옮긴 사람 또는 옮겨 가는 사람.

 

굳은살에 박힌 가시는 찾아내기 어렵다

가슴에 박힌 가시는 어떤가?

사람마다 제 가슴에 박힌 가시를 본다면

언제 슬픔이 그를 지배하랴?

 

오, 하나님 당신께 도움을 청하고 있는

저의 자아를 등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

자유롭기를 추구하고 있는 저의

자아로 부터 자유롭기를 저는 바라나이다.

저보다 더욱 저와 가까우신 분 말고는 그 누구한테서도 자유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나'라고 하는 물건이

순간 순간 당신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난의 때를 대비하여

사전 준비에 빈틈이 없는

지혜로운 사람은

친구의 죽음에서 경고를 듣는다.

 

 

 

"사랑의 연금술"

 

텅빈 우주의 별을 건너

당신은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당신은 초월과 순수

상상할수 없는 아름다움

사랑의 진수를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당신이 만지는 것은 모두 변하고

세곳적인 관심,

힘겨움과 슬픔은

당신 앞에서 물처럼 녹아내립니다.

당신은 지배하는자에게나 당하는 자에게나

농사꾼에게나 제왕에게나

누구에게나 기쁨을 선사합니다.

당신의 은혜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고

모든 악행은 선으로 변화합니다.

 

 

 

 

처음 제라룻딘 루미(1207-1273)를 알게된 것은  14년전 류시화 시인이 엮은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대도 알았더라면"에 실린 그의 시를읽고 나서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의 무덤(Mevlena 박물관)에 들려보기위해  2008년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의 카파토키아를 지나 안탈랴로 향하며 중간에  콘야(Konya)에 하루 머물기로 했다

콘야(Konya)는 "양의 가슴"이란 뜻을 가진 말로 BC 18,000년전 호수였던 지역이 물이 말라 평원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이코니움(Iconium:성경엔 이고니온으로 기록/사도 행전 14장)"으로 불리워지던 곳으로 터키의 최대 관광지 카파도키아에서 230키로 떨어져 있다.

알렉산더 점령후  그의 사후에 장군들에 의해 버가모 왕국이 되었다가 로마로 넘겨져 BC133년 부터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콘야는 초기 기독교의중심지보다 더 중요한 지역으로 사도 바울이 그 도시에서 추방되기는 했지만 일찍부터 기독교 지역이기도 했다.

터키의 셀주크 왕조는 11세기에 콘야를  수도로 삼았다.

 

페르시아 사람들과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은 루미를  '젤라룻딘 발키"라고 부른다(터키어로 Celaleddin)

젤라루딘은 13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사상가이자 시인으로 1207년9월 30일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아프카니스탄 중앙지대 북쪽 에 위치한 발크(혹은 발흐)에서 태어났다.

루미Rumi는 '로마 아나톨라아에서 온사람'이란 뜻이다.

1215년 에서1220년 사이 그의 가족이 몽골군대의 침공을 피해 콘야로 이주했다

 아버지 바하엣딘 왈라드(Bahauddin Wallad)는 신학자에 법학자에 신비가이기도 했으며 고령의 왈라드는 콘야의 한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1231년1월  젤라룻딘은 아버지가 죽자 난민 신세가 되어콘야에 온 아버지의 제자 부르하넷딘 무하키크를 통해 아버지의 비밀스런 내면 생활에 대하여 배웠으며 엄격하고 금욕적인 스승밑에서 신비주의 오솔길을 익혔다.

루미는 시리아 에서 수학 후 콘야로 돌아와 아버지를 이어 철학자가 되어 깊은 사상과 철학 세계를 이루었다

부르하넷딘 무하키크는 1240년 콘야를 떠나 얼마되지않아 가이사리아에서 죽었다.

루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코냐의 탁발승 공동체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이흐(sheikh교수,선생) 자리에 앉았다.

1244년 늦은 가을 10월의 마지막날  ,한 나그네로부터 낯선 질문을 받기까지 평범한 종교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 나그네는 방랑하는 탁발승 타브리즈(현재 이란 북서부에 있는 도시로 터키에 가깝다)의 샴스엣딘(Shams of Tabriz)였다.

샴스가 던진 질문에 유식한 교수 루미는 혼절하여 쓰러졌다

그에게 던진 질문은 예언자 무하마드와 바스따미(?-874:엄격한 금욕주의자로 북 이란 산악지대와 사막에서 유랑생활을 한 수피)가운데 누가 더 큰 존재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두사람의 첫대면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그들의 우정은 인류 역사상 사장 신비로운 관계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몇달 동안 아무일도 하지 않고 순수한 대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곳에서 거의  2년동안 루미와 집중적으로 대화를 나눈 샴스는 그들의 관계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가족과  제자들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불미스러운 폭력사태가 나기전에 콘야를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나자 젤라룻딘은 울적해했으며 페르시아어로 시를 써본적이 없으면서 음악과 춤과 詩作에 흠뻑 빠져들었다.

샴스를 찾기위해 수개월을 기다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그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루미는 샴스를 데려오기위해 21살의 아들, 술탄 왈라드에게 금과 은을 주어 시리아로 보냈다.

젤라룻딘은 벗을 가까이 붙잡아두려는 욕심에 자신이 데려다 키운 수양딸 키미야와 결혼시켰고 샴스는 이 키미야를 몹시 사랑했다.

그들은 루미의 집 작은 방에 살았는데 작은 아들 알라헷딘이 샴스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친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1247년 키미야가 죽자 샴스도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다.

실종설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샴스가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밤중에 사람들이 그를  집밖으로 불러내 칼로 찔러 죽인뒤 우물속으로 넣은 것으로 보이며 그 우물은 지금도 존재한다.

젤라루딘은  들째아들  알라헷딘이 공모하여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262년 이 아들이 죽자 그는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 아들이 낳은 자식들은 가족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친척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젤라룻딘은 도처에서 샴스를 보았고 도처에서 그를 찬미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몇시간이고 춤의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젤라루딘은 전대미문의 황홀경 속으로 뛰어어들었다.

그는 황홀경과 춤에 사로잡힐 때마다 금세공사의 숙소를 찾았으며 금세공사들의  망치질에 매료되어 내면에 특이한 영감을 떠올렸으며

그가 선회하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소란스러운 망치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금 세공사 살라헷딘과 친분을 쌓았다

1235년 젊은 나이로 콘야에온 살라헷딘은 비록 문맹이긴 해도 스승 부르하넷딘의 총애를 받는 제가가 되었다.

그의 천막에서 샴스와 젤라룻딘과 자주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젤라루딘을 만나며 차분한 성격의 살라헷딘은 스승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콘야의 주민들은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는데  적어도 샴스엣딘이 교양있는 사람이었다면 단순한 금세공사는 한번도 기도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젤라룻딘은 새로운 관계를 다지기위해 자기의 아들 술탄 왈라드를 살라헷딘의 딸 파타마와 결혼 시켰다.

살라헷딘이  병에 걸려 오래동안 앓다 죽자 그의 장례는 신비스러운 회전춤 속에서 치러졌다.

왜냐하면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 영적인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사건을 접하고서 콘야의 율법학자들이 들고 일어 났다,

젤라룻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러한 트집쟁이들에게 詩로 응수했고 가차없이 비꼬았다.

젤라룻딘 에게는 신비스러운 영감이 끊이질 않았다.

샴스를 만나 엄청남 열정을 경험한후,금 세공사와 교제하면서 정화의 시기가 이어진다.

그런 다음 남은 인생 15년간  젤라룻딘의 마음은 나이 어린 벗 후사멧딘에게 기운다.

"후사메딘 이분 하산아치 투르크"는 콘야의 중산층에 속했다.

젤라룻딘은  금욕적이고 부지런하며 상냥한 청년 후사멧딘을 아꼈다

젤라룻딘은 어린  벗 후사멧딘에게 "지야 울 하크",즉 "진리의 빛"이란 별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스승에게 부탁하기를 <*사나이>와 <*아타르> 작품에만 의지 하지 않도록 스승의 지혜를 받아 적게 해달라고 한다.

그는 스승이 사원을 찾던 목욕탕에 가든 소용돌이 춤을 추던간에 스승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니면서 스승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시를 받아 적었다.

그런 다음 이 시들을 스승 앞에서 다시 한번 낭독했다.

완성돤 시는 제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이 받아쓰기는 젤라룻딘이 임종하던 달까지 계속되었다.

젤라루딘은 총 6권으로 된 "마스나비(Mesnevi혹은 세마 마드나위Madnawi )"를 저술했다. 총 25,600편의 시가 실려있다.

그래서 6권은 이렇다할 종결이 없으며 이야기의 매듭이 지어지지않은 채로 남아있다.

젤라룻딘은 기독교의 수도승및 사제들과 교류하였으며 그의 시 가운데 상당수는 여느 이슬람 시인에게는 찾아 볼수 없을 만큼 기독교 사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대다수  시구는 꾸란의 경구와 예언자의 전승을 넌즈시 암시한다.

그의 시는 세속의 욕망과 비천한 일에서부터 극도의 높은 형이상학과 우주적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갖가지 차원들을 높은 영적 각성의 수준에서 다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적 걸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마스나비가 구술되던 시기 '아나톨리아 '정국은 악화되었고 마침내 셀주크 왕국은 붕괴되고 말았으며 루미도 탈진했다.

1273년 방방곡곡에서 제자들이 몰려들었으며 12월 17일 저녁 그가 세상를 하직하자 모든 종교 단체가 그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저마다  나름대로  의식을 거행하며 그를 기려 노래했다.

"그는 우리의 예수,우리의 모세였다"

환희의 춤이 몇시간이고 이어졌다.

루미는 죽음에 이르면서 정신과 육체 모두 '신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었다

 

젤라룻딘의 사후 후사메딘이 제자들의 모임을 이끌었다.

고분 고분한 아들로서 언젠가 아버지의  첫번째 벗을 시리아에서 모셔왔고 두번째 벗에게 사위와 제자의 자격으로 몸을 의탁햇던 술탄 왈라드는 아버지의 세번째 벗도 어른으로 모셨다,

1283년 후사멧딘이 죽고 비로소 그는 제자들의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제자 집단을 진정한 교단으로 조직하고 춤 의식을  제정했다. 

젤라룻딘은 병들어 사망하기까지 당대학자들이 따를 수 없는 깊은 사상과 철학세계를 이루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메드의 생활과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본받아 청빈,검소한 생활을  하여 "이슬람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것이 <수피즘>이고 메블라나는 수피즘을 토대로 참선을 중시하고 봉사와 선한 생활을 강조하며 학자나 권력자 보다는 서민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가 쉬운 교리를 전파했다.

인간은 평등하며 누구든 차별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교리의 중요한 부분이다.

'오라,오라.네가 누구든지 오라.

이교도건 무신론자든 그 누구든지 오라"

이 아름다운 문구는 메블레나교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이다>

세마(선무의식)는 메블레나교의 명상 수행의 한 방법으로 수피댄스,세마댄스,마블레나 댄스등으로 불리운다

그의 영향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터키인들은 그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름 앞에 붙은 메블레나라는 칭호는 아랍어로 '우리 구주'라는 듯이다.

해마다 12월이면 터키 콘야에서는 메블레나를 기념하기위해 "메블레나"축제를 연다.

샴스엣딘과 젤라룻딘의 우연의 만남으로 점화된 불꽃으로 남긴 작품의 여광은 온 세계위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들의 임종의 날에

나를 땅속 깊히 가라앉힐지라도

그대들은 잊지마라

나의 마음은 지상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나의 관이 움직이는 것을 보더라도

'분리'라는 말이 들리지 않게 하여라

간절한 만남이 영원히 내게 있으니

사람들이 나를 무덤속으로 데려갈지라도

 "인젠 이별이로구나"탄식하지마라

나를 위해 복이

장막뒤에 마련되어 있으니.....

 

 

메블레나 젤라룻딘 루미는  인류에게 일곱가지 교훈을 남겼다.

 

1.In generosity and helping others be  like a river(남에게 친절하고 도움 주기를 물처럼하라)

2.In compassion and grace be like Sun(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3.In concealing others' faults be like night( 남의 허물 덮는 것을 밤처럼하라)

4.In anger and fury be like dead(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하라)

5.In modesty and humility be like earth(자신을 낯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하라)

6In tolarance be like sea(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7.Either exist as you are or be as you look(있는 대로, 보고 있는 대로 행하라)-

 

사진:2008년 터키 부르사(Brusa:오스만투르크의 초기 수도)에서 본 세마댄스.

춤추는 사람을 "세마젠"이라 부르며 춤추기 전에 걸쳐 입고  나오는 검은 망토는 무덤을 의미,머리에 쓴 긴모자는 묘비를 의미 한다.

인간이 가장 겸손해지는 죽음의 순간을 느낌으로써 신과의 합일을 꾀하는 의식이다.

 

 

 

 젤라룻딘 루미에 관한 시집이나  그의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상당히 제한적이며 그에 관한 책도 많지 않다.

책점을 검색해 가까스로  발간된 책중 재고가 한권씩 남은 책점들을 찾아가 어렵게 구한책이 "사랑안에서 길을 잃어라"와 "루미 평전 나는 바람 그대는 불"이다.

또 다른 시집이 있었으나 내용이 부실하고 조잡하게 만들어진데다가 가격이 엄청 비싸  포기하고 말았다

 

*사나이와 아타르-신비적인 교훈시를 쓴 선구자들로 젤라룻딘의 어법은 그들의 영양를 받았다.

그러나 루미의 저작에 가장 영감을 준 것은 꾸란이었다.

 

*이현주:1944년 생으로 감리교신학대 졸업.목사,동화작가,번역가

 

*안네 마리 쉼멜(Annemarrie Schimmel):이스람문화와 스피즘,루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19세에베르린 대학에서 이슬람  언어와 이슬람 문화로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년 23세의 나이로 교수가 되어 마르크부르크 대학교에서 아랍어와 이슬람 문학을 가르쳤다.

1954년 동대학교에서 종교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 터키 앙카라 대학 종교사 교수로 임명되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아 터키문화와 신비주의 전통에 몰두했다.

1967년부터 1992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은퇴후에도 명예교수로 인도 무슬림 문화를 가르쳤다.

독일 본대학의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60여년간의 직업상 화려한 이력과 업적을 뒤로하고 2003년 운명했다. 

 

*김순현;감리교 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 졸업여수 돌산 갈릴리 교회를 섬기며 영성 고전 을 번역하는 일에 함쓰고 있다.

 

-메블레나 젤라룻딘 루미의 시와 생애에 관해서는  상기 도서와   "가고픈 성서의 땅-터키" (이영희 지음/2006년 발행)에서 발췌하고, 정리하고,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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