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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르트르와 보봐르

Jay.B.Lee 2009. 11. 9. 04:32








'D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신  경  숙


어떤 자리에 갔더니 돌연 화제가 이혼으로 모아졌다. 이혼한 사람들의 사례들이 쏟아졌다. 반응들도 여러 가지다. '좀 참지'에서부터 오죽하면 그렇게 했겠느냐, 잘했다…등. 분명한 것은 이제 이혼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일단은 비판적이었던 예전에 비하면 이혼도 정당하게 평가받는 분위기다.
주변에서도 근 1~2년 사이에 이혼한 사람이 여럿 늘었고 나부터도 이젠 누가 이혼했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럴 만해서 그랬겠지 싶다. 대화 주제도 이제는 이혼 자체보다도 이혼 후의 삶으로 옮겨가는 성숙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최근에 '어느 사랑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앙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겨우 89쪽짜리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세 번이나 책상에서 일어났다가 앉았다. 감동도 감동이지만, 뭐랄까 마음이 아플 지경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났기 때문이다.
저자 앙드레 고르는 오스트리아 출신 사상가이며 언론인이다. 16세 때 독일군 징집을 피해 스위스로 이주하고 사르트르를 만나 그와 깊은 인연을 맺으며 실존주의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파리로 이주해 '미셸 보스케'라는 이름으로 기자생활을 하기도 한다. 생태주의와 노동이론의 선구자이기도 하며 60년대 68혁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며 사르트르에게서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인물이다.

고르가 아내 도린을 만난 것은 스위스 로잔. 고르는 도린에게 첫 눈에 반했다. 이주에 이주를 거듭하며 불안한 삶을 계속했던 고르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늘 사랑이 결핍된 채 지냈던 도린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각각 스물넷과 스물셋의 나이에 결혼하게 된다.
어머니가 떠나버린 상태의 계부 아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란 영국 출신 도린은 훗날 프랑스 국적을 얻고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창간한 지성인이기도 하다. 사교적이고 늘 밝은 표정이었던 도린은 늘 삶이 불안했던 고르가 최상의 저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도우며 살았다.

1983년 도린이 '거미 막염'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얻게 되자 고르는 자신의 모든 활동을 접는다. 고르는 도린을 위해 파리를 떠나 보농이라는 시골에 집을 얻고 20여 년을 아내 도린을 간호하며 지낸다. 고르는 '아내 도린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보았고 '그 본질을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포기한 것이다. 보농에서 그들의 삶은 '검소한 살림, 유기농으로 자급자족, 여유로운 시간 갖기, 나무 가꾸기, 진솔하게 대화하기, 저술활동, 친교활동'으로 재구성되었다. 역으로 도린의 병이 오히려 그들에게 그들이 이론적으로 추구했던 '완전한 삶'을 살도록 해준 셈이다. 고르는 자신의 생태주의 이론을 도린을 간호하며 삶의 방식으로 직접 살아내게 된다.

'D에게 보내는 편지'는 아내 도린을 향해 쓴 사랑의 고백이면서 유서에 가까운 글이다. 이 책 속의 도린을 향한 고르의 사랑은 경이롭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까지 이르는 글을 읽어가다 보면 그 신성함에 숨이 멎을 듯하다. 그들은 작년에 평화롭게 죽은 채로 시골집 침대 위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에게 알려달라는 메시지가 문에 붙어 있었다. 그때 그들의 나이가 여든셋과 여든둘이었다. 죽음까지도 함께한 완전한 삶이었다.

부부간의 이혼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일이 예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쿨'해진 이 현실에서 'D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오직 당신뿐"이라는 사랑의 감정에서도 순정이나 아름다움보다는 상대를 억압하는 스토커 분위기를 더 느끼게 되는 이 현실이 부추기는 고독이 한순간 덮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대사회는 예전과 달리 다양한 인간관계가 가능하다. 그런데도 행복한 사람보다 고독한 사람이 늘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서로의 실패와 상처와 폐허를 받아들이는 깊은 관계가 성립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고르와 도린 같은 경이로운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인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르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린이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아픈 도린과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아픈 도린으로 인해 고르의 삶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완성된다.

죽음까지도 함께하는 그들의 삶이 감동으로 밀려들었던 것은 헤어짐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는 이 현실에서 의지할 수 있는 인생을 느꼈기 때문일까? [소설가]







'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 지음

(2007년 11월 / 학고재 펴냄)



젊은 날의 앙드레 고르와 그의 부인 도린 케어



2007년 9월 어느날, 한 프랑스 철학자와 그의 아내가 동반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두 사람이 누운 침대 곁에는 "화장한 재를 둘이 함께 가꾼 집 마당에 뿌려달라" 는 편지가 남아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의 이름은 앙드레 고르. 그의 부인은 도린 케어. 둘의 자살소식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고르는 유럽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철학자다. 렉스프레스지(紙) 기자를 거쳐 누벨 옵세르바퇴르지(誌)를 공동 창간했고, 스승이자 친구였던 장 폴 사르트르가 별세한 뒤 그가 창간한 레탕모데른지(誌)를 이어받았다.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한 신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자 녹색정치의 창시자였다.

이 책은 84세의 남편이 스무 해 넘게 불치병과 싸운 83세의 아내에게 보낸 연애 편지다. 고르는 1983년 아내 도린이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거미막염이라는 불치병에 걸리자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간병에만 매달린다. 고르는 아내의 죽음이 가까워오자 그들의 사랑을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는 이렇게 탄생되었고 2007년 11월에는 국내에서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고르는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고백으로 끝맺음하였다. 그 1년 뒤인 2007년 9월 22일, 부부는 소도시 보농에서 극약을 주사해 함께 목숨을 끊었다. 시신은 이틀 뒤 발견됐다. 유언에 따라 화장한 재는 부부가 말년을 보낸 집 뜰에 뿌려졌다.





책은 어느 부분을 읽어도 가슴이 찡하다.
고르는 글을 써야 하는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함께 한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죽기 전에 이 일을 해야만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리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글을 대중들을 위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아내만은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편지는 그들의 동반 자살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최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에 드러나는 한 지성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눈물겹다.

"당신은 라 졸라의 드넓은 해변에서 바닷물에 두 발을 담근 채 걷고 있습니다.
당신은 쉰 두살입니다.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책의 마지막에는 그가 아내와 함께 죽을 것을 결심한 듯한 귀절이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나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자기 품에 안긴 그녀의 희고 매끄럽고 따뜻한 몸을 그는 오래도록 바라봤다.
말 없이, 숨을 멈추고, 찬탄에 차서.

때는 1947년, 장소는 스위스의 로잔. 돈도 없고 나라도 없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앙드레 고르의 인생에 영국 여자 도린 케어가 총총히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이 서로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맺었다. 남루한 셋방에서 처음으로 살을 섞은 뒤 지난 9월 프랑스 시골마을에서 동반자살 하기까지, 꼭 60년 동안 그들은 한 쌍의 원앙새처럼 정답게 살았다.


흔히 부부는 결혼 서약에서 백년해로(百年偕老)를 말하고, 죽음이 닥치면 같은 날에 함께 눈 감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부부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아니, 신경숙 작가의 말처럼 이혼이 일상사가 된 요즘 세태가 아닌가. 이 두 사람의 경이롭고도 행복한 60년 사랑과 그 아름다운 마무리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사르트르 같은 배꼽 밑이 개차반인 스승 밑에서 우째 이런 제자가 나왔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사르트르만 그랬든게 아니고 그의 천재아내 보봐르도 참 자유 분방했다.

앙드레 고르의 순애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름도 뜨아한 <계약결혼>이란걸 했으니 굳이 서로 외도를 즐겼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사르트르는 보봐르를 유혹할때 아예 처음부터 자기의 섹스철학을 선언했다.

많은 여성과 자고 싶다고. 흔히 <여행 多妻 비밀이 없는것> 세가지가 사르트르의

인생 원칙으로 알려졌는데 다처와 비밀이 없는거는 다 性과 연관있는 조건들.

사르트르는 아예 <중심>과 <주변>을 설정했고 보봐르를 이해 시켰다.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파리 고등사범 동기. 이학교는 파리의 <附高>다.

프랑스 안에서 수많은 사상가와 학자를 배출한 진짜<천하>다.

그러니까 보봐르를 중심에 두고 외식(?)을 즐기시겠다고.

그래서 보봐르 인생은 사르트르에게 애인 대리처 요리사 메네저 보디가드

그리고 간호부로 기능 하면서도 경제적 법적으로 사르트르 인생속에 이렇다할

대접을 받은바는 없다. 보봐르는 사르트르와 첫대면에서 부터 知的 가위에 눌려

평생 그의 노예(?)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1949년 현대 최초 여성해방선언인 <제2의 性>을 썼으니......

"사람은 여자로 태어 나지 않는다. 여자로 만들어 지는것이다." 이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의식적으로 반영한 소리지만.

 

157Cm키에 사팔뜨기인 사르트르에게 왠 여자들이 그렇게 많이 꼬여들었는지.

문학사에 이름을 요란하게 남긴 여인만 10여명 이다.

올라 코나키에비츠 처럼 보봐르의 제자도 있고(문학사가들은 보봐르가 뚜쟁이 노릇 했다고 본다)

그 동생 올라 봔다도 있고. 보봐르도 여자니까 어느때는 질투가 나 자기제자 올라를 소설

<초대받은 여자>에 등장시켜 죽여 버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떡하니 자서전에다가 "이런 선택을 만들어낸 사르트르와 올라에게 분노를 느낀다"고 써 놓았다.

 

하도 사르트르 노는게 눈꼴이 시니까 문학비평가 르베르 프랑시스는 사르트르의 소설

<출구없는 방> 비평에서 "우리모두 사르트르를 알고 있다. 그는 자기 제자의 속옷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변태적 대학자"라고 썼다.

 

프랑스에서는 좀처럼 남의 배꼽 밑은 잘 따지지않는 사회인데도 사르트르의 병통은 다른 여인과의

정사를 보봐르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친절이 괴이했다. 보봐르와 부부로 육체관계는 이미

1943년인가 마감했고 1950년대 말에 들어서면 사르트르 영감은 정력도 좋게 한꺼번에 4명의 애인과

섹스를 즐긴다. 미셸, 아르레트, 이브렁, 봔다등 그중 아르레트를 보봐르가 가장 미워 했다.

 

사르트르가 얼마나 사깃꾼인가는 <변증법적 이성비판 1960>이란 책을 펴내면서 "보봐르에게 바친다"라고

헌사를 써놓고 딱2부만 출판사 갈리마르에 이야기 하여 "봔다에게 바친다"로 바꿔 애인 봔다에게 갖다 주었다.

 

그런데 보봐르란 여자도 사르트르 못지 않다.

작가 아더 쾨슬틀러와 넬슨 알그렌과 질펀한 정사를 즐기고 사르트르에게 가서 자랑을 했더니

이 영감이 코웃음만 치더라고 <레 망다랭LES Mandarins>에 써놓았다. 미국 소설가 넬슨 알그렌은

보봐르와 연애한번 잘못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레 망다랭>에서는 보봐르가 넬슨과의 정사를

익명으로 처리해 주었는데 두번째 자서전 <여자의 한창때>에서는 '넬슨'이란 실명을 밝히는것은 물론

넬슨이 보낸 연애편지까지 책에 다 실었다.

기자들이 들여 닦쳐 확인 하자 "세상곳곳의 매춘가를 가 보았지만 그여자들은 그래도 반듯이

문을 닫는 예의가 있었는데 이 여자 보봐르는 문을 활짝 열어 졏혀놓는 개망나니"라고 비난하고

그날 밤 흥분을 못이겨 심장마비로 죽었다.

 

또 보봐르는 동성연애 상대 <나타리 소로킨>부모로 부터 제소를 당해 대학 교수직도 잃고

교수면허도 취소 당했다.

 

분명 Esso가 이처럼 순애를 기린 앙드레 고르는 1980년 사르트르의 영구를 뒤 따라 몽파르나스

묘지로 향했던 5만의 조문객의 하나였으리라.

Esso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밑에 이런 지저분한 글을 달기가 미안해 Re로 뺐다.

 

지난겨울 나는 빗속에 사르트르 보봐르 묘를 몽파르나스 묘지로 찿아가 참배했다.

내 不文學 50년을 되돌아 결산하는 거금을 들인 여정 이었는데 미국에 와 손녀와 놀다가 보니

아직 글쓰는걸 착수도 못했다.

제삼 이글을 읽는 동문들께 미안하다고 말한다. 너무 배꼽밑 이야기를 지껄여.

그건 분명 신사가 할 이야기는 못된다.

자 이제 수년전 사다놓고 쳐밖아둔 보봐르의 <노년>이나 읽어야 겠다.

 

안양 씨야

출처 : 씨야 memorandum
글쓴이 : ec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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