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회사에 입사한후 총무부서에 나보다 나중에 입사한 직원이 있었습니다.
공채로 회사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오로지 글씨를 잘쓰기 때문에 특채로 입사를 한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청와대에 들어가는 공문이 있을 때 타자친 공문에 회사 관인을 찍어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 임금님께 올리듯 두루마리에 정성스럽게 붓글씨로 써서올리던 때라 그 분의 임무는 막중했습니다
옛 공문을 뒤지다가 서울 시청에 보내는 공문에 "允許(윤허)하여주시기 바람니다"라는 공문을 발견하고 웃던 시절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나중에 입사했지만 나보다 몇살 위인 년배였였습니다.
총무부에서 여러가지 잡일도 겸해서 했는데 일같지 않은 일중에서 주요한 일은 전직원의 부의금 봉투를 대필해주는 것입니다.
당시는 요즈음 처럼 祝 結婚 혹은 賻儀가 인쇄된 봉투가 없어 그분께 모두 부탁하곤 했습니다.
글씨가 워낙 명필이어서 그분에게 가훈이나 좋은 글을 받으려고 예약한 사람이 줄을 섰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글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상사인 총무부장조차 글씨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나는 그분을 이해 할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화가나 도공처럼 잘된 작품은 남주기 아깝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더우기 줄수 없는 예술가의 정신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일한지 10여년을 못채우고 그분은 회사를 떠났고 나도 해외로 발령 받아 서로 소식을 모른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그분을 우연히 종로에서 만나 반갑게 자리를 함께 하여 지난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생활이 어려워 우선 편하고자 회사에 입사했지만 날이 갈수록 회의가 들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보다글씨가 못했던 함께 공부했던 친구는 어려운 가운데 서예학원을 운영하며 글씨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국전 특선 작가가 되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대가대열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몇년을 회사에서 대필이나 해주다 문뜩 정신을 차리고 회사를 나왔지만 공백이 너무컸는지 글씨가 전처럼 써지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오로지 한길을 갔더라면 하는 생각에 후회막급이었지만 이제는 돌이킬수 없는 세월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분이 주고가는 명함에 경기 지방대 한문학과가 박혀있었습니다.
전강이나 조교수일 것입니다.
서예가로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시들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에 아직도 사로 잡혀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분과 악수하며 헤어지며 젊은 날을 돌아봅니다.
이제는 돌이킬수 없는 날들을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은 은퇴했을 그분도 더이상 후회하지 않으며 남은 날들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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