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조지아,아르메니아 부부 자유여행(2018.10)

아르메니아 (20)-Genocide Memorial Museum

Jay.B.Lee 2018. 12. 17. 19:59

 

 

 

    

 

 

사진 "Yerevan 학살 박물관-꺼지지 않는 불꽃.

희생당한 많은 영혼들을 위해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을 처음 방문 한 때가 2010년 , 이란을 방문하기 위해 Yerevan을 들린 2012년이 두 번째다.

아내에게  아르메니아의 슬픈 과거사를 알려줄 필요가 있어  학살 박물관을 다시  찾았다.

아르메니아 서부(터키의 동부)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6세기에 걸쳐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오스만 터키는 'Non -Turkic communities와 Minorities(크루드족 같은 )"를 제거해왔다.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 위원회는   "New Pan -Turkic state"를 지향하여 , 1차 대전이란 이점을 이용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끝내지 못한 " Armenian Case"를 실행에 옮겨 그들의 이상인 'Pan   Turkic Idiology"를 실현할 기회로 삼았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CUP의 3인 위원에 의해 시스템적이고 조직적으로 실행되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15세에서 45세까지 남자를 징집해 "노무 대대(Labor Battalion )"를지원한다는 핑계 삼아 정규군에

보냈다.

1915년 4월 24일 (Genocide Remembrance  Day) 오트만 당국은 300여 명의 지식인 -성직자, 의사, 언론인, 기자, 법률가, 교수, 정치인 등을 콘스탄 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추방하여 비참하게 살해했다.

같은 날 약 5,000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집에서, 거리에서 오트만 당국에 의해 살해당했다.

1915년부터 1918년 사이 터키 동부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주민들은 시리아의 "Deir ez -Zor "사막으로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고 그들은 기아와 강간, 살해 등으로 죽어갔다.

그들 중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았으며 대학살 결과  아르메니아인들은 근접 국가로 피신해  Diaspora Community를 형성했다

(현재 8백만 명의 Diaspora를 헤아리며 그중 4백만 가량은 러시아에 거주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라 세계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실제 수백 명이  목격하였고  많은 외교관들은   오트만의 지원 아래 행해진 수많은 사건들을 기록했다.

그러나 어느 외국의 기관/나라도 아르메니아인들을 살해 (Slaughter)로 부터 구조하거나 방지(Prevent) 하지 못했다.

1923년 통계에 의하면 터키 동부 지역에 살던 2백5십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숫자는 대량 학살 후 5만여 명으로 감소했다

터키 정부는 강력하게 학살을  부인해 왔으며 터키 내에선 "Genocide"란 말조차 금기어가 되었다.

터키가 EU에 가입하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아르메니아 대학살 인정이라는 선제 조건도 있는 듯하나 그냥 터키가 싫을 뿐이다.

2008년  터키 노벨 문학 수상자 오르한 파묵(2006년 소설 "Snow"로 수상, 현재 컬럼비아대학에서 방문 교수로 가르친다)이 "이제는 진실을 얘기할 때가 되었다"라고 발언한 뒤 터키 내에선 "매국노""배신자"란 비난을 받았다.

 국가에 의해 고소를 당했으나 몇 년이 지나 슬며시 취하하고 말았다.

터키 정부는 터키 정부 아닌 "오스만 제국"시절에 있었던 사건이라 책임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으나 변명이 상당히 궁색하다.

현재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의 관계 개선을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으나 공식적인 사과가 선행되지 않는 한 풀리지 않는 매듭이다.

여행자로서 국경이 개방되지 않아 터키에서 아르메니아로 , 아르메니아에서 한 발자국 옆인 터키로 이동은 금지되어 불편하다

마찬가지로 은원 관계에 있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도 국경이 막혀 , 중간 완충지대이며 양국과 사이가 원만한 "조지아"를 경유하여  통행하여야 한다.

수많은 나라가 현재까지 대학살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전쟁 당시 처음 5,000여 명의 여단을 파견 (연인원 15,000명)하고 1,000명이 사망한 우리의 형제 나라요 혈맹인 은인의 나라를 비난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Face book 친구 중에 가까운 터키인들도 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여행 후 몇 장의 사진을 올렸으나 아르메니아 Genocide 박물관 사진만은  절대 올릴 수가 없다.

친절한 나의 터키 친구들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은 아르메니아의 입장에서 본 것이지만 터키 입장에서는 기울어져 가던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파생된 복잡한 정치문제에서 터져간  산물이 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터키와 러시아와의 아르메니아의 관계가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진실을 말하거나 밝혀 내는 일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개관적으로 보자면 터키를 싸잡아 비난할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다.

아일랜드 아사자 200만 명에서 영국이 자유롭던가.

나미비아 학살이나, 유대인 학살의 주범 독일, 콩고 학살 당사자 벨지움, 무슬림을  학살한 불가리아 ,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 등과 식민 제국 시절 저지른 악행의 당사자들..

아르메니아는 1.5백만 명이 죽었다고 추론하고 일부 사람들은 60 만내지 100만 명이라고 추측도 한다.

문제는 숫자의 정확성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인간들에 의해 <대량 학살 > 당했다는 사실이다.

아르메니아인뿐 아니라 이 당시 죽은 사람들 - 아시리아인 25~75만 명, 4~5만의 무슬림, 5~20만 명의 무슬림(왈 레비)및 크루드족등도 있다.

 사막으로 식량과 물도 없이  내쫓겨 죽어간 앙상한 뼈만 남은 아르메니인들-특히 부녀자 사진들이 가끔 눈앞에 어른 거린다.

 평화가 가득한 세상이 되길 기도한다.

 

 

 

 

 

 

 

 

 

엊그제 프랑스 대통령 마카롱이  헌화한 꽃.

아르아 마니아 학살에 부정 금지법까지 만든 프랑스.

프랑스는  알제리 대해 어떻게 하였는지 궁금하다.

언제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캐나다 퀘벡 수상 헌화

 

 

 

 

 

 

 

아르메니아 대통령 헌화

 

 

 

 

 

 

 

 

 

 

 

묵념하고 있는 참배객들.

 

 

 

       

아르메니아에서 많이 생산되는 석류로 만든 십자가상.

땅에 뿌리박은 여러 가지들이 모여 아르메니아의 결속과 풍요를 상징하고 파란 잎들은 그들의 미래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사랑아 래서.

 

숙소 호스텔 부근의 작은 카페-Bakeryyerevan.. SWiss Hostel과   같은 건물에 있다.

 

커피, 간단한 아침 식사 등을 판다.

처음 도착한 날  친절했던 여직원이 생각나 한잔의 커피를 시키고 잠시 휴식을 했다.

가격은 싸지 않은 편.

 

벽면을 낙서들.

 

 

 

한글도 보이는 걸 보면 한국인도 다녀갔다.

 

        Yerevan Hostel이나 Swiss Hostel 부근에는 괜찮은 곳이 세 군데 있다.

이 카페와 이태리 레스토랑, 커다란 카페가 성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