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아들이 캐나다에서 겪은 작은 차별들 .

Jay.B.Lee 2017. 1. 18. 02:59

벌써 오래전 이야기 입니다.

전에 잠깐 쓴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토론토 5년 주재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1993)아들(고1)은 좋다고 했습니다.

어린 딸(중2)은 그냥 남들처럼 캐나다에서 살면 않되냐고 친구들과 헤어짐을 섭섭해 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토론토에서 학군이 제일 좋다는 Northyork  City 에 살아 근처 학교에 다녔습니다.

딸에게 물었습니다.

뭐하며 먹고 살지?

뭐  Grocery Store나 남들처럼  Convenience Shop ( 당시 토론토에선 85%정도를 한국인이 운영)되잖아
딸은  캐나다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말을 잘했고 학교 반아이들을 휘어 잡으며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반에는 한국아이가 늘 한두명 있었구요,
아들은 5년간 한국 아이가 없는 반에 다니며 외롭게 보냈고 알게 모르게 차별을 많이 겪은 모양입니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자 제일 반가워했으니까요.


처음 도착후(1988) 초등학교 6년 때(한국에서 5학년 말이나 6년초로 편입)중국 아이 둘이 텃세부리며 계속  못살게 굴었다 합니다

  방과후 까지 집에 오는 길에 따라오며 괴롭히자  태권도 발차기로 한방에 제압했다 합니다.

저도 태권도를 오래 수련한 적이 있어 아들이 커서 적당히 힘이 있을 초등학교 3년 가을 부터 도장에 보냈습니다.

 아들은 캐나다로 떠나기 전까지  2년간 매일 수련하여 불랙 벨트를 땄습니다.

그후로는 그들이 못살게 굴지 않았다 합니다.

아들은 학교친구들을 집에도 종종 데리고 왔습니다.

 백인은 하나 없고  베트남, 이란 출신의 부모를 가진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허긴 20여명의 반아이들들중 중 백인은 Minority에 속합니다.


한번은 아들이 중2 때 악기를 대여 받으려악기실에 갔습니다.

  대출 카드에 본인 스스로 이름 적고 악기를 집에  가져와 연습들을 합니다.

나중에 야마하 연습용 크라리넷을 사주었지만 처음엔 학교 것으로 연습했습니다.

마침 한학년위 백인 두녀석이 실로폰 연주  막대기(Wooden Hammer) 로 장난하다 친구녀석이 아프다고 하자 거짓말이라며   마침 들어온 아들을 보고 확인한다고 아들머리를 살짝 때렸습니다

아들이  아프다고 하자 거짓말 말라며 다시 한번 쳤습니다.

화가난 아들이 대여실을 나오며 욕을 하자 이 녀석둘이 쫓아와 아들을 잡았습니다

 "너 가방에 칼있잖아 꺼내 "

칼 주인 아인 가방에서 칼을 커내 아들을 뒤에서 잡고 옷 손목위에 칼을 그었습니다.

칼은 " Rambo "가 사용한 칼과 유사한 걸로 길이가 손잡이 포함 30센티 정도 입니다.

아들이 그거 진짜 칼이냐고 묻자

그래 진짜칼이라며  이번에는 목에 람보칼(30센티)을 가까이 대며 위협했습니다.

그러고 놓아 주었는데 아들은 음악실에서 악기 대여 리스트에 적지 못하고 가져온 것이 걱정되어 다음날 음악 선생에게 사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악기보다 놀란 선생은 교장에게 ,교장은 즉시 경찰에 보고 했습니다. 

경찰은 달려가 아이들 집을 수색하여 증거물을 압수하고  오래지않아 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인 한녀석은 양아버지와 사는 녀석이라는 데 복도 건너편에 기다리는그 양아버지는 안절 부절했습니다.
좀 초라해 보이는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내가 형사냐고 묻자 변호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할 말 없다고 꺼지라고((Fuck Off) 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 그들의 행동에 약간 화가 났습니다. 

변호사는 건너 아이 어머니에게 이번 사건은  너무 일방적이라 변호할 말이 별로 없다.

그냥 판사에게 달렸다고 설명해주는 듯 했습니다.

작은 재판정.

캐나다에 주재중 세번이나 재판정에 나가 보았는데 첫 재판정이었습니다


검사는 증거물인 칼을 칼집에서 꺼내 판사앞에  제시했습니다.
(당시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은 30% 정도가 가방에 칼을 가지고 다니다 는 통계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판사는 혹 아들이 긴장 할까봐 가벼운 일상 질문들로 아들을 안심시키고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약식 재판였지만  형식은 일반 재판과도 또 같습니다.


검사의 집요한 질문.
왜 때렸냐?
실로폰 막대기를 맞은 친구가 아프다고 해서 거짓말 같아 마침 악기실에 들어온 아이에게 정말 아픈지 확인하려 했다.
그래 때리니까 뭐라든?
아프다고 했다.
그래 아프다고 확인했으면 되었지 왜 또 때렸냐 ?
......
왜 칼을 꺼냈냐 . 

나가며 욕을해서요
왜 옷 손목위에 칼날을 댓냐 
........
그리고 아들을 뒤에서 잡고 목에 칼을 대며 위협했냐?
손목위에 칼을 대자 진짜 칼이냐고 물어서요.


변호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아들이 백인이었다면 그녀석들이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인종차별적 요소가 있음에도 재판에서는  거론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판사가 아이 부모로서 할 말이 있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의 의견이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겠으나   갑자기 남의 자식 키우며 없는 돈 변호사에게 낭비하며 초초해하던 계부(Step Father)가 불쌍해 보였습니다.

" 저 나이또래  아이들은 칼을 가지고 다니는게 자랑이고 단지 그냥 과시(Show off )하고 싶은 나이 입니다. 

실제 칼을 가지고 아들을 다치게 (Hurt)할 의도는 없었다고 믿습니다

모두 저 아이들에게 관대하게 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이든 흑인 서기가 뜻밖의 발언이라 여겼는지 공감이라는 듯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습니다.
판사는 고심하더니 판결을 내렸습니다.
"6개월간 매 토요일마다 사회 봉사실에 나와 매번 반성문을 써야 한다"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게하는 재판은 공정했다.


아들이 초등학교를마치고 집근처 주니어 하이스쿨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한학년에   French  Class반이 있는데 일반 영어반에 비하여 부모들이 비교적 부유한 아이들입니다.

학교에서 겨울 퀘백주 몬트리얼에 스키여행을 간다고하여 스키를 배운 아들에게 좋은 기회다 싶었습니다.

특히 퀘백은  유명 스키장이 많은 곳입니다.

 450불(캐나다 달러) 정도의 참가비를 내고 3박 4일 훈련에 인솔교사를 따라 

참가하게 되는 프로그램에 보내주었습니다.

스키를  다녀온 아들은 참가자가 전부 자기까지 5명으로 4명은 프렌치 반 아이들이었답니다.

생각해보면 중학생에게 스키와 스키복 일습을 갖추어 스키를 가르치는 여유있는 상류층 부모들이 많지 않은 것이지요.

4일동안 저네끼리 불어만 지껄이고 아들에게 인사도 않고 밥먹을 때도 저희끼리만 먹고 아들은 4일 내내 오전 오후 스키만을 열심히 타며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합니다.

차별내지 우월 의식이 있었던 거지요.

새로운 나라에서 산다는 건 부모들보다 아이들에게 더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 역시 Survival  Game 이었습니다. 

언어와 보이지 않은 차별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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