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하늘나라로 떠나신 처고모

Jay.B.Lee 2016. 2. 25. 07:29

처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망연해 있던  아내.

아내가 울자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외손자가 물었다고 한다 

"할머니 왜울어 "

"고모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

"내가 할머니랑 놀아주면 기분이 나아질까?"

다섯살 된 외손자가 생각이 깊다.

향년 87세.

안사람에겐 아버지와 고모 남매뿐으로 원래 함경도분들이시다.

얼굴을 보지 못한 장인의 숙부가 서울에서 큰 사업을 해 한국전쟁 발발전 일가들을 다 불러 들여 이미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수도 여고를 나오신 처고모가 대학갈 무렵 동네에 신문 돌리던 착실하고 잘생긴 고학생  총각을 눈여겨 두었다가 할머니(아내의)가 혼사를 치루게 했다.

결혼으로 처고모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장인은 고아나 다름없던 청년을 매제로서 맞기엔 달가워하시지 않았고 처고모는 어머니의  설득과 강압에 결혼을 한 셈이다.

처 고모부는 이북에서 혈혈 단신으로 이남에 내려온 분이다. 

일찍 군 장교로 입대하여  백선엽 장군의 부관도 했다고 들었다. 

국방 대학원에서 알게된 기업가의  권유로 중령으로 예편후 굴지의 식품 업계에서 중역으로 일했다

처고모는 5년동안  자녀가 없다가 삼형제를 낳았다.

삼형제중 처 고모부를 가장 빼어닮은 맏 처남은 작은 사업을 하고 있고 둘째 처남은 미모의 피아니스트와 결혼후  미국으로 들어갔다 

불법 이민이 되어 영주권이 없는 상태에선  몇년전 처고모부 (부친)사망시에도 한국에 들어 올 수가 없었다.

종종 미극내 불법이민자 구제시에도  무슨 사정인지 영주권 취득을 못하다가 다행스럽게 3-4년전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얘길 들었다.

처 고모부 내외가  두번의 미국여행시 만나서 경제적 도움을 주고 왔다는 얘길 들은지도 아주 오래전이다.

처고모의 막내 처남은 자폐증을 앓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결혼을 시켰다.

아일 하나 낳은후 막내 처남은  15,6년전 사망했다.

무슨 사유인지 나는 처고모부 내외나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처고모가 치매가 오자 고모부는 요양원에 입원시킨후 당신은 두달후 갑작스렇게 발견된 암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82세.

나에게 일본어를 연구하여  일본 발음을 완벽하게 만들수 있는 보완된 글자를 만들어 일본 학자와 접촉하고 있다고

나에게 설명해주셨는데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오래 사셨으면 우스꽝스러운 외래어 일본 발음이 개선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양원에 있던 처고모는 남편이 별세했는지 몰랐고 나중엔 남편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 부부가 요양원을 방문할 때마다 하나밖에 없는 여조카인  아내를 기억하곤 끌어안고 울곤 하셨다.

아내와 처고모는 얼굴이 닮아 딸이라해도 전부 믿을 정도다

나도 조카사위로 기억하다가 5분만 지나면 언제 왔냐고 묻곤 했다.

평상시엔 장남의 얼굴을 알아보고 둘째와 셋째가 있었다는 기억이  전혀 없으셨다.

 3년여 고양 소재 요양원에 계시다 시설이 더좋은 천안으로 옮기셨다.

천안에 찾아갔을 땐 같은 방 노인들에게 우리 딸이라고 자랑했다.

우리 부부가 천안 요양원을 다녀온후 얼마후 고관절이 부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고모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으나 그후로 찾아가질 못했다. 

장인의 유일한 혈육인 처고모에게 한번 더 가보자고 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

장례식장에 다녀온후 발인날 손자를 돌봐야 하는 아내를 두고화장장으로 떠나기전  새벽 4시 다시 장례식장을 찾았다.

큰 처남 외에 올사람이 없는 곳에 조금  낯익은 남자가 있다.

둘째 처남이 연락을 받고 미국에서 급히 들어온 모양이다.

서로가 처음 잘 알아보지 못하고 30년만에 보는 얼굴 .

세월과 그 동안의 고생 탓인지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중장년의 모습이 남았다.

처남댁을 불러 인사를 시킨다.

결혼한다고 함께 집에 놀러왔던 처남댁은 내일 모레가 환갑인데 믿을수 없을 만큼 아직도  고왔다.

조카는 하날 두었으며 대학 졸업후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 스마트 폰으로 상복 입은 처남 부부의 얼굴을 담았다.

세종시로 화장하러 떠나며 조카들과  처남  모두 넷이서 운구를 했다.

너무 가쁜하게 들어 올려지는  관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삶의 무게는 더 무거웠으리라

 항상 명랑  쾌활하시고 탁구도 잘치고  유머가 많아 노인들에게 인기 많던 처고모.

곧 한줌의 흙이 되어 대전 현충원, 남편 곁에 묻힐 것이다.

대전 옆을 지나 오가는 길에  대전 현충원에 들려 보아야 겠다.

생전 딸같이 여겨 이뻐했던 아내를 위해서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