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죽음은 부끄러운 일인가?

Jay.B.Lee 2016. 3. 16. 07:39

지난 가을 서울대 응급실에 있다는 외사촌의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입원도 못한채 응급실에 혼수상태로 누어있는 외사촌을 찾은 건 제수씨와 간신히 통화를 한뒤였다. 

담담히 설명하는 제수씨의 얼굴에 지치고 포기한 표정이 역역하다.

췌장암 .

제수씨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것 같았다

혼수 상태에 빠진 외사촌 동생 파리한 얼굴을 본뒤 곧 예정된 해외 여행을 떠나야해서 소식을 문자로 남겨주길 부탁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전화했을 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 전화를 했다. 

일주일만에 의식이 돌아와  요양 병원에 있다는 것이다.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갔다.

외사촌은 딸만 다섯인 외할아버지께 양자로 들어온 외삼촌(가까운 일가도 아닌 그냥 종친이라고 했다)이 상처후 재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엄격히 따지면 전혀 피가 섞인 친척이 아니다.

그러나 내겐 그게 전혀 문제 되지않는다.

어린시절 외가에 가면 만나던 사촌이니까.

형님 어떻게 왔느냐며 찾아간 나를 맞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예의를 찾으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식사를 제대로 못해 마른 얼굴이 더 말랐다.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어린다.

 나는 동생이 다시 깨어나 그 동안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죽음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심을 감사하고 싶었다

얼마전 직장 후배에게서 나와 같은 직장, 후배였던 대학동기가 죽었다고 전한다.

 죽기 두달전  모임에 나와서도 동기들에게 자기가 암인것을 숨기고 떠났다했다.

자기 나름대로 마지막 친구들을 보고 간 것이겠지만 친구들과 정식으로 이별을 할 수 없었을까

조금 일찍 떠난다하여 실패한 인생을 산 것인가?

누구나 꼭 죽는 사실을 잊은채 남아 있는 자보다 내가 먼저 간다는 죽음이 부끄러운 것일까 ?

어차피 가게되면 알게 되니 그것으로 본인에게 족했을까.

일찍 암으로 사망하며  가족에게조차 병을 숨기고 죽은 고교 동창들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고 싶지 않은 깊은 사랑의 배려였을까 .

아내와 가족들에게 남편과, 아버지와 이별할 시간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독한 인간들이었나

이제 그들이  떠난지 20-30여년이 되었다.

하나는 xx공사 사장 비서를 하던 동창이고 하나는 지방 대학 교수로 있던 동창이다.

비서였던 동창은 병원에 입원 일주일후 사망했다.

교수 동창은  갑자기 사망하자 혈액암으로 죽은 걸 알았다고 한다,

문제는 친구들이 그가 없어질 때마다 혈액 투석을 위해 상경한다는 걸 몰랐고 그의 가족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할 때 죽음을  끌어안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까

가족들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에게 고통스러울 지라도 함께한 시간이 지나고 보면 큰 위로가 되는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

평소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여야한다.

여행을 떠나듯 가볍게 행장을 꾸리고 마지막 이별의 연습을 해야한다

 빚쟁이 야밤 도주하듯 부끄럽게 숨길 필요는 없다

그동안 사랑했던 사람들과  보고 싶은 사람들과 충분히 작별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초췌한 모습으로 남기전에.

외사촌은 그런대로 큰 고통없이 떠났다. 

"형님"하며  전화를 통해 쾌활하게 부르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서 90이 넘은  외숙모께서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