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고교친구의 첫번째 개인전

Jay.B.Lee 2015. 6. 13. 15:06

 

"가을 서정"

      

 

 

 

고교친구의 개인전 오프닝이 인사동  조형갤러리에서 있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하고 첫 개인전을 연다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그가 자연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 하는 모습은 물고기의 회귀 본능과 닮아있다.

그의 전시회 도록에 실린< 자전적 이야기>.

우리들의 지난 얘기이며 가난한 시절의 아름다운 회상이다.

7순을 맞아 화가가 되고 싶었던 학창시절과 한 시대의 삶을 담았다.

캐나다 이민후 다시 영구 귀국하여 다양한 취미 -장거리 마라톤을 여러번 완주하고 창과 고잔무용을  배우는 가운데 수멀 수멀  올라오는 어린 시절의 꿈을 화폭에 실현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화폭에 그리움을 담은  두번째 개인전을 기대해본다.

 

<돼지를 태운 자전거는 신작로를 달리고.... >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나는 여섯살 쯤이었다.

돌맹이가 튀는 신작로는 차만 지나가면 안개속이었고

앞뒤바퀴 사이가 긴 짐 자전거는 고성을 지르는 돼지를 태우고

돌을 피해 신작로를 조심 조심 달리고 있었다.

그 시절 부대 종이에 자전거를 그렇싸하게 그려 어른 들에게 칭찬을 듣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 걸려 있던 그림은 ....>

농촌의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그림을 많이 그린것 같다.

그 시절 "똥종이"라 불리던 회색 종이에 크레용으로...

크레용은 잘 칠해지지않았고 양초를 문지르는 것 같았다

학교 복도에 졸업할 때까지 걸려 있던 내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왜정때 목조로 지어진 건물은 지금 간데없고 그자리에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어져 공군 사관학교 정문 앞에 지금도 건재한데.....

 

<펜티 속에 돈을 숨기고....>

중학교 다닐 때 미술반에 들어가

자주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그 시절 청주에는 제대로 된 화방이 없었다.

이젤를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은 오매불망이었다.

소매치기가 많다고 펜티 속에 주머니를 만들어

돈을 넣어주시던 어너니는 지금 이세상에 안 계신다

하루 종일 완행열차로 서울에 가서 종로 2가인가에 있던

미림 화방에서 나무로 된 야외스케치 이젤을 손에 넣으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하루에 켄트지 한장 배급받아....>

중학교때 첫번째로 뵌 미술 선생님은 엄재원 선생님이셨다.

최근에야 "토요 화가회"회장을 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물자가 없던 시절.

하루에 한장 이상은 켄트지를 받을 수가 없었으니

망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얀 4절짜리 한 장을 받아 합판에 압정으로 박으면

여간 기분이 들뜨는 게 아니었다.

 

<4.19혁명의 함성이 들리고.....>

중학교 2학년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생대회에 참여했다.

그 때부터 촌놈이 서울 구경을 많이 했다.

홍익대학 사생대회,수도 여사대 사생대회등....

사생 대회가 임박하면 매일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야외 사생을 했다.

중앙 공원으로,청주 사대 교정으로 ....

멀리서 라디오는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그의 창고에선 4월인데 수박이 나왔다는 뉴스도 함께.....

 

<그것이 아마 첫 연휴 사생이었나 싶다>

중학교 때선생님 모시고3박 4일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단양 팔경은 청주에서 왜 그렇게 먼곳이었나

하루 종일 비포장 도로를 삐꺽거리며 달려왔다.

그 시절 버스는 내장재가 나무로 되어 있어꽤나 삐꺼덕거렸다

구담봉,옥순봉,도담 3봉,사인암등 모조리 화폭에 담았다.

시원한 비루 한잔 생각나신다고 하시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비루는 비어의 일본식 발음이다.

요즈음은 막걸리가 사생지의 비루지......

 

<시발 택시인가? 시바근  택시인가?>

한번은 서울로 사생대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시절 수채화 국산 물감은질이  여간 나쁜게 아니었다

색도 선명하지 않고 물기 따라 풀리지 않은 흙같은 것이 따라 다녔다.

서을 시내는 시벌 택시가 줄지어 달리고 있는데

3학년 선배가 그것을 자꾸 "시바근 택시"라고 우겨댔다.

그도 그럴 것이 시발이라 쓰지 않고

  시바-ㄹ이라고 쓰여 있었으니

7층짜리 미우만 백화점인가 올라가 보고 얼마나 놀랬는데

지금은 123층 빌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다.

 

<그게 첫 개인전이던가?>

고등학교 3학년 땐가

윤지용 시인이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다.

어느 날 그로부터 전시회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가 시를 쓰고 나는 그시에 맞는 그림을 그려 시화전을 열었다.

며칠 밤을 새면서 그리던 생각이 난다

그 덕에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인터뷰도 해보고 .....

그 친구는 지금 이세상에 없다.

"맨발의 청춘"을 억수로 잘부르던 친군데

 

 <1억불 수출한 제 1회 수출이 날이 지금은 .....>

초등학교 땐 산에 가서 잔디씨를 훑어 학교에 제출하면

국가는 그걸 모아 수출했다는데

1964년 ,드디어 우리나라가 1억물을 수출했다

그 기념으로 "수출의 날"이 생기고 전국에 수출 장려 포스터 공모전이 있엇다.

며칠 밤을 세워 출품 했는데 3등상을 수상했다.

그 후로 포스터 공모전마다 출품하는 바랍에

집안에서 유일하게 안경을 쓰는 신세가 됐다.

 

<비너스를  가슴에 안고.....>

선배들에 의하면 내년도 홍대 입시시험에

구성 과제는 우물속 같이 깊은 것이 소재로 나올것 같단다.

덕택에 우물 속을 꽤나 연구했다.

데상은 아그리파를 무척 연습했는데

비너스가 나울지 모른다고 한다

청주엔 비너스 석고상을 파는 데가 없어 대전으로 가서

겨우 비너스 상을 구할 수가 있었다.

담요로 겹겹이 싸서 가슴에 안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올랐다.

 

<취직은 도안과가 잘되지......>

건너 방에서 고모부와 어머니가 언쟁을 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전쟁때 아버지는 희생 되셨으니

고모부가 내 진로에 대해 조언을 많이 하셨다

그림 그려먹고 살기 힘드니 상대나 공대를 보내자는 고모부에게

어머니는 제가 하고 싶은 걸 시키겠다는 의견을 내놓으 셨다.

그래서 나는 회화과보다는 취직이 잘되는 도안과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염색한 군복을 입고....>

검정 색으로 염색한 군대 야전 잠퍼에

앞부분을 뾰족하게 개조한 워커가 대학생의 복장이었다

클래스엔 가난한 남학생이 많았고 여학생들은 대부분 부유했다.

여학생이 하기 힘들어 하는 일.즉 판넬를 짜주는  일,물 도배등을 해주면서

물감 꽤나 얻어 썼다.

당인리 가는 기차는 자취방 좁은 창문 가까이에

아랫배를 보이며 덜컹 거리는 바람에 푹자기는 어려웠다

마음씨 착한 여학생들이 갔다주던 김치 생각이 난다.

 

<그 아주머니는 어디 계실까?>

상하이 트위스트는 암울하던 시절 우릴 신나게 했다

크리스마스 캐럴리 거리를 덮는 계절이다

친구 몇이 크리스마스카드를 며칠 밤을 새워 만들어

미도파백화점 앞에 이젤을 세우고 난생 처음 장사를 해봤다

예쁘다며 열장을 사가시던 아주머니는

지금 어디서 고운 할머니로 살고 계실까?

그날 우린 홍대앞 철길 포장마차에서

배터지도록 꽁치를 구워 먹었지

카바이트 막걸이와 함께......

 

 

 

 

한희환:청주 중,고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광고대행사 "오리콤"제작국장

디자인 프로덕션 "ARTbank"설립 운영

010-2531-1970

 

 

       

전시회 개회 행사.

                                                                          "겨울 속으로" 

 

"교회 가는 길"

 

 

 

 

 

 

 

 

 

 

 

 

 

 

 

 

 

 

 

 

 

 

 

 

'인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에서 온 토속주  (0) 2015.08.15
커피와 이그림님  (0) 2015.08.13
명리학 박사가 된 동창 이야기  (0) 2014.12.30
아르메니아 에서 만났던 앤 (D'Ann)  (0) 2014.12.14
초등학교 여자동창 친구이야기  (0) 2014.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