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슈퍼우먼이 된 친구부인

Jay.B.Lee 2014. 1. 13. 10:58

 

 

 

 

친구의 부인은 신촌에서  이바지 떡집을 한지가 35년이 넘었다

이바지 음식과 카터링이 전문으로 한때는 자기 빌딩에서 규모있는  한식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부인의 인맥과  음식솜씨에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사가에 손님들 식사를 만들어 납품하기도 했다.

친구 부인은 요리사가 아닌 요리 연구가다.

EBS인가 요리방송인가 나왔다는데 직접 방송을 본적은 없다.

친구 부인이 만든 맛난 음식을 수없이 먹은 나로서는 진정한 요리 연구가임을 인정한다.

친구 부부가 한동안 절에 나가나 싶었더니  언젠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명동 성당에 결혼 부페 카터링 서비스를 하기 시작했다.

로얄 호텔을 비롯 모두  네곳의 음식점에서 돌아가며 납품한 것도  신자들이 시식후 투표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제일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데 부페음식을 음식은 가짓수에 연연하지 않고 맛있게 먹기좋게 낭비없이 고급으로 내었다. 

친구는 은행 지점장을 끝으로  은퇴하였는데 근무시에도 퇴근하면 떡집 종업원이요 구매 담담자였다.

자칭 송편빚기는 수준급이라고 한다. 

아내는 콩은 어느 가게 누구,밤은 어디서 ,미나리는 누구에게서 식으로 가장 좋은 물건 파는 곳,사람들을  지정해 주었다 한다.

그가 지방으로 발령받았던 것도  잠시 부인이 얼마나 내조를 잘했으면 금방 서울로 돌아와 내내 서울에서 근무하며 보냈다.

부인이 은행 실세 중역의 부인과 친해져 온갖 봉사를 한 덕이라고 한다.

결혼후 그녀는 남편이 장남인지라 딸 셋을 난 다음 마지막으로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시부모님을 돌아 가실때까지 서울에서 모시고 살았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조문객을 위해 특별히 주문해 두었던 아끼바리 쌀 두가마로 밥을 지었고 직접 국밥도 만들었다.

초상집에서 맛있는 잔치 음식을 즐기고 온 것 같아 망자에겐 조금 미안했다.

친구와 부인은  자녀 교육을 위해 캐나다로 이민을 한후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했다.

가끔  이웃인 캐나다인들을 불러 한국음식을 대접했는데 음식맛에 깜박 죽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친구네가  이사후 몹시 섭섭했을 것이다.

자녀들이 캐나다와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 무렵 미국으로 오가더니 뉴욕의 한식 음식점에 자문과 납품을 하고 투자를 했다.

지금은 영주권을 반납하고 주로 한국에 머문다.

친구가  한번은 관상장이를 찾아갔더니 아무 복도 없고 오로지 "처복"만 있다는 말을 들었다 했다.

수긍되는 점이 있어 어쩌면 그렇게 잘 맞추냐고 우리 모두 웃었다.

그가 음식점 카운터에 있을 때 도움이 되기는 커녕 손님이 다시 오고 싶지않은 차가운 인상에 인복이라곤 전혀 없어 보인다.

한 때  부인은 이화여자대학교에 김밥 납품권을 따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적어도 새벽 3-4시에 김밥을 만들어 새벽에 납품해야 하는데 그시간에 일할 사람을 구할수 없었다고 한다.

남들처럼 전날 밤에 만들어 맛없어진 김밥을 납품하기엔 자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도 그녀의 가게에서는 밤껍질을 직접 까고 콩도 직접 깐 콩으로 떡을 만든다.

재료에 관한한 무척 까다롭다.

일하러 배우러 온 청년들이 왜 시장에서 깐 콩과 밤을 사서 쉽게하면 될 것을  일이 힘들다고 수시로 그만둔다고 한다.

인내심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녀의 떡집은  조금 비싸고 맛있다.

오래전 교우인 교수 부인에게 딸 혼사시 이바지떡집으로 소개하자 그 여집사님은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정말 맘에 들더라고 칭찬을 했다.

작으마한 체구의 그녀는 네자녀를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보듬으며 집안의 부를 일구었다.

지금도 친구 부인은 지금도 미국과 한국에서  ,떡과 음식사이에서 또 정치 활동과 지역 사회 봉사 활동을 하며 열정과 성실로 뛰고 있는 슈퍼우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