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남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 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깨달은 것은 아주 아주 어릴때 부터 향성 되어 온것 같다.
1957년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인가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큰삽을 하나씩 가져오게 했다.
어린 우리들은 삽을 들고 끌며 십리 길을 걸어서 교외 도로까지 간 적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지나간다는 시골 도로구간중 일부를 할당받아 청소도 하고 손 흔들어 환영해야 하는 이유가 전부다.
대통령을 환영하고자 잔뜩기대했던 우리는 각하께서 자동차 아닌 헬기를 타고 가셨다는 얘길 듣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목은 마르고 배고프고 힘이 없어 큰 삽을 질질 끌며 신작로 돌에 부딪치는 짜증나는 파열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생각하면 잘 보이고자 알아서 기는 바보같은 어른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일주일에 한번 조회가 있었는 데 이는 순전히 일제시대 교육의 잔재였다.
책임자 선생님은 운동장 단상에서 올라 "앞으로,옆으로 나란히"를 수없이 외치며 우리들을 반듯하게 세우기 위해 분투 노력했다.
스스로 말잘한다고 생각했을까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세워 놓고 길고 긴 훈시를 하던 교장들.
봄 가을은 괜찮았으나 특히 여름이 문제였다.
빈혈이 있는 약한 아이들이 땡볕에 퍽퍽 쓸어져도 어리석은 교장은 좀처럼 개선할줄 몰랐다.
세월이 가면서 다행히 조회행사가 한달에 한번으로 바뀌긴 했다.
얻은 교육적 결과라면 어린 나이에 여름 아침 더위를 참아야 하고 겨울엔 시려오는 발가락을 꼼작거리며 추위를 참아내야 하는 인내심뿐이었다.
중학생이되면서 부터는 3.1절 ,광복절,개천절같은 기념일엔 시내의 남녀 중학교,고등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이 제일 크다는 공고운동장에 모여야 했다.
누런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 모여 정열하는데만 한시간반정도가 소요되었다.
대표 선생이 고래 고래 소릴 지르고 귀에 섬짓한 호르라기 소리는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잘났다는 인사들의 기념사 내지 경축사는 왜그렇게 많고 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른이 된다는 것-타의에 의한 구속에서 좀더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좋아 성인이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별것도 아닌 영화의 한장면을 가지고 학생 입장 금지가 되었고 학생입장 환영 영화도 단체입장 아닌 개별로 가면 여학생에겐 불량 학생으로 간주 정학을 시키던 시절이다.
빵가게를 들렸다 발각된 여학생 또한 처벌 대상이었다.
빵집은 오로지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만나는 은밀한 장소로 인식했던 교육 관계자들의 생각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외출 하거나 휴일 외출시에 여학생은 학생복을 입지 않고 돌아다니다 학생 주임 선생에게 발각되면 또한 처벌감이었다.
가난한 시절이라 교복이 한벌밖에 없어 세탁도 제대로 할 시간이 없는 여학생들은 고역이었으리라
자유로운 대학시절을 보내며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에게 전도하려던 학교 친구가 생각 난다.
그 때 버트런트 럿셀의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를 열심히 읽어 영향을 받은 탓도 있고 종교 조차 남을 너무 구속하는 것처럼 보여 좀처럼 다가가기 힘들었다.
주일 오전 예배,오후 예배.수요 저녁 예배 ,금요예배,구역예배,철야 예배등
길에서 가방든 목사와 우르르 몰려 다니는 여자들을 보며 여자와 소인배는 한가하면 딴 생각을 많이 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떠 올렸다.
신앙생활조차 딴 생각 못하게 교인들을 달달 볶으며 개인 생활을 구속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기독교인이 된 지금도 과거 한국 교회의 전도 방식과 가정이 우선되지 않은 제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후 입대하여 절제된 개인의 구속 생활 -군대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이미 선현들이나 선배들이 거친 길이라 불평하지 않았다.
입대 당시 청와대를 습격한 이북 124부대의 김신조 일당 탓에 6개월 늘어난 35개월 11일의 복무기간이 일종의 구속이긴 했다.
대학 졸업후 회사에 입사하여 가끔 사전 통보 없이 참석해야 하는 부서 저녁 회식 때문에 개인 약속을 취소해야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좋은 회사 ,예산이 넉넉한 것도 탈이었다.
상사들에게 믿보이고 싶지 않아 입사 시부터 나자신 "회사 최우선주의"를 적용하여 참아 내야 했다.
또 상사들이 퇴근 하지 않고 있을 때 미리 퇴근 하기가 가 어려워 상사가 퇴근 하길 기다리던 때가 많았다.
특별한 약속이나 데이트가 있을 때 먼저 퇴근 한다고 말씀 드리면 되었지만 잦으면 미움을 살까봐 두려웠다.
회사의 일이 많을 때는 야근은 물론 휴일 근무도 군소리 없이 즐겁게 열심히 일했다.
시간외 근무 수당이나 휴일 수당이 별도로제도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내가 책임자가 되면서 부서 회식은 일주일 이전에 통보하여 직원들의 개인 일정에 문제가 없도록 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일없는 직원들은 칼같이 퇴근하도록 분위기를 바꾸었다.
술을 좋아 하거나 화투를 너무 좋아해 직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종종 부하 직원들을 수시로 끌고 다니던 타부서, 타회사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던가
어느 직원의 부인은 회사에 전화걸어 제발 남편에게 술좀 그만 먹이라고 하소연 을 했다고 들었다.
해외로 발령받아 토요일 근무가 없는 그곳에서 주재원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토요일 근무를 해야 했다.
토요일은 현지 외국인 직원들이 없어 토요일 정해진 근무 시간을 끝내고 한국 주재원들만 모여 별도의 회의를 했다.
정해진 시간이 없어 특별한 회의 안건도 없는 날도 질질 끌다가 퇴근하면 짧은 겨울 날 밖은 캄캄 했다.
회의가 필요없이 길어지는 것은 가족없이 혼자 해외에 나와 있던 사장의 개인적 병적 습관 때문이었다.
당시 일요일엔 슈퍼,백화점이 열리지 않는 그 나라에서 집식구들을 데리고 집에서 먼 현지 슈퍼마켓과 한국식품 가게를 돌아다녀야 하는 주재원들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가족을 데리고 새로 부임한 사장은 자기도 먹고 살기 바빠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었다.
왜 사람들은 남을 구속하길 좋아하는가.
회사엔 여름 휴가조차 관례적인 4일이상을 사용하면 눈치주던 시절도 있었다.
해외 근무를 통해 개인적인 삶과 행복이 존중되는 사회를 확인하며 평소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 알게 되었다.
나는아이들이나 아내및 타인에게나 구속아닌 자유로움을 주길 원했다.
그리고 나자신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런 이유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로 나는 집에서 새나 물고기를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재도 싫어 한다.
동물원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들을 보면 항상 연민의 정을 느낀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병들어 일찍 죽는 한이 있어도 초원에서 마음 껏 달리다가 죽는 사자의 삶이 우리에 갇혀 오래 사는 것보다 값지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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