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행·산책

가을의 마지막을 보낸 창경궁 정원

Jay.B.Lee 2022. 11. 18. 06:07

수능이 있던 날 30분늦게 손자를 학교에 보내고 지하철보다 차로 창경궁으로 향했다. 

혹시 시간이 부족하지않을가 우려하는 안사람 .

올림픽 도로가 원할하여 창경궁 주차장에 적당한 때 도착 하여 크지않은 주차장에 자리를 잡았다.

(주차장은 위탁 경영한다)

정말로 가을의 끝자락을 잡았다 가을이 절정이었을 2주전의 모습을 상상한다.

단풍 구경은 다른 곳에서 하지말고 내년에는 궁에서 하자는 안사람.

서울의 5궁을 다시 구경하는 일도 계획을 해야한다.

종묘까지 포함 시켜야지.

내년에도 건강히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하자

 

창경궁엔 떨어진 낙엽을  담은 마대 주머니들이 곳곳에 쌓여있다.

아주 오래전   몰디브에 갔을 때일이다.

새벽에 리조트에 출근 하는 현지인들 .

 새벽 산책시 만난 여인들은 잔디 밭에 지난 밤  떨어진 꽃잎들을 바구니에 하나 하나 모두 주어 담은 후 투숙객님들이 깨기전 모두 조용히 사라졌다.

관람객들을 위한다면 미리 치워야 한다(수당 문제가 아니다)

창경궁은 사진을 찍으려 해도 여기저기 거추장스럽게 널려 걸리는게 낙엽 가마니였다.

 

 

춘당지

백송;

중국이 원산지로 중구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대부분 천연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서울에서 백송을 더보고 싶다면 헌법재판소, 서촌 박노수 미술관 정원, 북촌 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대온실-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는 1907년 전각들을 헐고 그자리에 동물과 식물원을 만들어 1909년에는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이었으나 궁궐의 권위를 격하 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느티나무.18세기 초반 심은 것으로 추정.

춘당지: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었다 임금이 시범으로 농사짓던 "내농포"라는논을 일제가 파헤쳐 연못을 조성했다.

성종대왕 태실비

집복헌 과 영춘헌-집복헌은 영춘헌의 부속 건물로 주로 후궁들이 거쳐 했던 곳이며 사도세자가 이곳에서 출생했다.

양화당 앞에서 해설사의 안내를 받고 있는  관람객들 .

위에서 본 통명전 

 

위에서 본 양화당 

왕비의 침소였던 통명전의 지붕이 다른 곳들과 구별된다,

오른 쪽으로 오라가면 창덕궁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정원을 같이 이용했다 한다.

통명전 

계절을 착각한 철쭉꽃

왼쪽 계단을 오르면 창덕궁 문과 연결된다.

통명전-왕비의 침전 으로 내전 의 중심 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양화당-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환경전-창경궁은 왕실 가족들의 주거 공간으로 지어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했다.

주로 왕과 왕세자등 왕실내 최고위급 남성들 머문 곳인듯하다.

또한 왕실의  상,장례공간으로 많이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전각이 사라졌으나 환경전은 박물관전시실로 사용해 많이 훼손 되었음에도 살아 남았다.

함인정(어짊에 흠뻑 젖는다는 의미):

임금들이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과거에 합격한 유생을 만나기도 하고 경연이나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633년(인조 11)건립,1830년(순조 30)에 화재로 손실되었다가 1833년 중건 했다.

중국  진나라 화가 <고개지>의 작품 ,춘하추동 사시의 한구절씩을 읊은 것이다.

 

"봄 물은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구나

가을 달은 밝은 달을 드날리고 

겨울 산마루엔 한그루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경춘전-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으로 대비가 머물고 산실로도 사용했다.

숭문당

숭문당-왕이 독서를 하거나 신하들과 토론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곳

명정전-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 임진 왜란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 할 때 그 모습이다.

옥천교는 춘당지와 연결되어 있다.

명정전 가기전 명정문은 공사중으로 현재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동쪽문은 "홍화문"으로 사진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