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과잉 친절의 나라

Jay.B.Lee 2013. 5. 9. 18:59

 

 

요즈음 정신 노동자란 말만 듣다가" 감정 노동자"란 말을 들으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말장난 같기도 하고 자꾸 사용하면 익숙해질까.

왜 우리나라에서는 친절 친절을 강조할까.

점점 인간미를 잃어 친절에서 멀어지는 시대를 맞아서일까.

오래전 우리나라 사람은 원래 남에게 친절한 민족이었다.

이제 친절을 교육하고 강조하는 것이 남의 입장을 배려하여 그러는 것이 아닌것 같다.

그저 상품을 판매하며 고객의 돈을 내주머니로 옮기는데 불편한 장애적 요소를 배제하려는데만 기를 쓰는 것  같아서다.

입으로만 하는 친절이 이곳 저곳에서 넘친다.

그나마 하지 않는 것 보다 낫지 않냐하면 할말이 없다.

우리나라에 시집온  러시아 여성이 한국에 와서 너무들 친절해 놀랐다고 하는 방송을 본적이 있다.

그네들의 무뚝뚝한 관습에 너무 익숙해 있다가 우리같이 친절해 보이는 이상한  나라의 풍경에 놀란거다.

서비스 업에 종사하는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감정 노동자들의 언행에서  친절이 무엇인지 본질적 문제에 대해 검토해 볼  때가 되었다.

과거 백화점 개점 시간 입구에 도열하여 입장하는 고객들에게 90도로 절하던 백화점 직원들.

어깨에 "친절"이란 휘장을 두르고 고객이 올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서오십시요 인사하던 은행원들.

나가는 손님들에게 하루 종일  머리 굽혀 인사하는 청원경찰.

 제법 크다는 일식집에 들어서면 초밥을 만들다 "어서 옵쇼~"하며 소리 지르는 종업원들(일본식이다)

훼밀리 레스토랑에서  무릅 꿇고 주문을 받으면 극상의 친절인가 .

그걸 친절이라고 보도하는 기자의 의식도  그렇고 그걸 따라하는 업소들도 한심했다.

스테이크 잘구어 가져다 주면 되지 돈  몇푼쓰면서  노예같은  모습을 보러 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친절의 도를 넘어 물건에 까지 경칭을 사용해주는 어색한 사회에 살고 있다.

비행기에서 주는 인스탄트 라면을 잘 끓여 오라 여승무원을 때린 문제로 사회가 시끄러웠다.

그런 교양을 가진 친구들이 대기업의 직원이고 중역이라는 것이 문제다.

한번 더 부탁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그냥 꾹참고 먹어주는 것도 어린 여승무원에게 고객으로서< 친절>이다 .

누구나 갑의 입장이 되고 싶어하고  갑의  특혜와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회가 존속하는 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요원하다.

어제는 격려 차원에서 허리를 툭툭쳤다는 윤창중 대변인인의 성추행으로 온세계가 시끌벅적한 모습이다.

어디서부터가 허리이고 어디서 부터가 엉덩이인지 따지기 앞서 <격려차원>이란 그의  "친절"이 문제다.

누가 만져달라고 했나.

 신입사원 시절  샐러리맨에게 주는 글이란 일본서적을 읽은 적이 있다.

딱 한가지 기억하기론 '출세를 원하거든 절대로, 절대로 사내(社內)의 여자를 건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윤창중씨가 그런 기본 개념이라도 알았다면 개인에게는 평생의 망신이요,국가에겐 피해를, 박대통령에겐 변명할 수 없는 누를 범하진 않았을 것이다. 

과잉친절에 공든탑 무너지기는 잠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