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서울경찰 악대가 추모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헐버트 박사 63주기 추모식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내 백주년 선교 기념관에서 있었다.
<추도사 :김종택 한글 학회장>
8월 5일은 겨레의 스승,호머 헐버트 선생께서 평생을 사랑한 나라 대한 민국에서 영원히 잠드신 날입니다.
선생께서 가신지 63년,저 도도히 흐르는 한강물과 함께 고귀한 넋이 되어 양화진 언덕에서 오늘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헐벝버트 선생님,이제 모든 시름 거두시고 기뻐해주시기 바람니다.
선생께서 그 처럼 사랑하셨던 나라 대한 민국은 이제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선진 국가로 우뚝섰고 ,그처럼 아껴주시던 한글과 우리노래 아리랑은 한류열풍을 일으키며 세계 문화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생의 크나큰 사랑과 은혜에 힙입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제국 주의의 침략 세력 앞에 나라의운명이 촛불처럼 나부끼던 1886년 우리나라에 오셔서 교육만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깨닫고 몸소 실천에 앞장 섰습니다.
최초의 신식 학교인 육영 공원창립을 주도하셨고 ,한성 사범 학교 교장,대한 제국 고문이 되셨으며 배재학당 교사로 취임하여서는 이승만 ,주시경등 숱한 인재를 길러내어 장차 독립국가의 큰 기둥이 되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한글을 배워 그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고 최초 한글 교과서인 "사민 필지(士民必知)"를 지어 백성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1896년에는 선생께서 직접 경영하던 상동 교회안 삼문출판사에서 제자 주시경과 함께 <독립신문>을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간행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에게는 새상일을 알게 하시고 온 세상 사라들에게는 우리나라를 알리고자 힘썼습니다.
사회 계몽을 위하여 YMCA를 창립하여 청년 운동을 일으키셨고 ,조선 왕조의 역사서 <대동기년>을 비롯하여 <대한 젝구 멸만사>를 쓰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아픔을 세계에 호소하셨습니다.
일본 국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언더우드 에비슨과 함께 스스로 고종황제의 침전을 지키는 불침번이 되셨습니다.
을사 늑약을 저지코자 고종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엑게 전하기도 하였고 ,헤이그 만ㄱ구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 제국 주의의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크나큰 은혜를 어찌 일일히 다 밝혀 말하겠습니까.
오로지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건국 이듬해인 1949년 7월 29일 광복절 행사에 정부의 초청으로 참석코자 꿈에 그리던 한국땅을 밟았다가 8월5일 순국하여 영원한 한국인으로 이곳 양화진 언덕에 잠드셨습니다.
이듬해 3월1일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 공로훈장 태극장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습니다.
어찌 그것으로 우리의 도리를 다 했다 하겠습니까.
이 시대의 선비 김동진 선생이 기념 사업회를 조직하고 선생의 일생을 담은 전기 <파란눈의 한국 혼 헐버트>를 지어 나누며 그 뜻을 널리 펼것을 호소하여 왔습니다.
순국하신 지 63년 ,마침내 서울시에서 한글마루지 사업의 하나로 가꾸는 한글 공원에 제자 주시경과 함께 동상으로 나마 나란히 서시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것으로 무거운 빚을 다 갚았다 하겠습니까.
기념관을 크게 세워 그 숭고한 정신을 길이 이어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선진 문명국가는 집을 잘 짓고 길을 잘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나는 문화와 역사로 채워져야 합니다.
겨레의 큰 스승 헐버트 선생님,기뻐하소소,고히 잠드소서-
추모식이 열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백주년 선교 기념관.
헐버트 박사의 묘소.
지인인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김동진 회장(체이스은 행 서울 대표,현 서울 과학 종합대학원 초빙교수)
안내서를 받으며 헐버트 박사가 1949년 40년만에 한국을 방문할 때 지니고 있던 여권 원본과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고종황제 탄신 50주년(1901년) 기념 은장을 볼 수 있었다.
추도식 중간에 군악대 연주로 헐버트 박사가 채보한 아리랑 연주를 들었다.현재의 아리랑과 조금 다르다.
헐버트 박사의 일대기가 슬라이드로 상영되었다.
배경음악이 잘 어울어져(처음부분에는 영화 Misssion의 주제곡이 사용되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인간의 삶의 순간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받는다.
자기 나라도 아닌 조선에 와서 한국을 죽기까지 사랑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헐버트박사의 업적이 알려지기 바라는 마음이다.
서울시의 이해와 협조로 한글에 지대한 공을 세운 헐버트의 업적을 기려,주시경 주시경 선생과 함께 동상이 선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에 있는 킬릴 문자를 만든 킬릴 형제의 동상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사진 ;안중근 의사 공술서
안준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여순 감옥에서 일본 사까이 경시(警視)에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헐버트 박사에 대하여 1909년 12월 2일에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혹독한 정략을 쓰고도 각국의 이목을 가리고 있을 때 헐버트는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 진력한 공을 몰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노구를 끌고 한달여 항해끝에 인천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
전라남도 박준영지사의 인사말-우리말,우리글 사랑을 강조했다.
차경애 YMCA 회장의 인사
독도 사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서유석씨도 나라 사랑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간략히 언급.
헐버트박사는 항상 실천하며 실용적인 것을 추구했다고 강조했다.
민족 사관고를 나와 미국의 Darmouth 대학생인 전범선군의 인사.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 다트머스 대학은 헐버트가 졸업한 학교다.
장래가 촉망되는 전군은 헐버트의 정신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였다.
"인류애"와 "정의감".
훌륭한 역사 학자가 되길 기원한다.
헐버트의 일대기를 보면 그의 교육환경과 가정 교육,그리고 감리교인으로서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실천한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업적은 한국인에게 더 널리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 나라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헐버트 박사의 손자와 이웃에 산다는 Robert Whirttemore
New York Mellon 은행 동경 지사장으로 추도식에 참석차 왔다.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을 읽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초상화를 그려 기증한 신길고등학교 "이 푸름"양
저런 젊은이들이 있어 한국의 미래는 밝다.
봅에게 부탁 ,헐버트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미국 이웃 지인의 할아버지가 100여년전 한국에서 얼마나 큰일을 하였는지 , 돌아가 미국에 널리 알렸으면 한다.
힐튼 호텔에 묵고 밤에 떠난다 하여 이곳까지 찾아준 마음이 고마와 집에 오는 길에 힐튼 호텔에 태워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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