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요리 연구가 하선정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읽었다.
유족으로는 따님 박희지씨가 있고 하는 기사를 보며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영동이 떠오른다.
충북 영동읍 계산동이 내가 태어나 유치원과 초등학교1학년까지 살던 곳이다.
피난후 돌아 왔을 때 우리집만 달랑 남고 앞뒷집 폭격으로 폭삭주저 앉았었더고 어머님이 말씀해주셔서 아는 영동집이었다.
길건너 집에는 마당에 석류나무가 있는 동무집이 있었고 좁은 길(고등학교때 방문 했을 때 길이 그렇게 좁은 줄 몰랐다)을 따라 몇발작 올라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왔다.
우측 코너에 양조장이 있었고 좌측으로 꼬부라지면 왼편에 방앗간이 있었는데 나보다 세살 위인 누나 친구인 희지누나네 방앗간이었다.
그러니까 피난시절 하선정씨가 하시던 방앗간이다.
10여년전 어린시절 살던 영동읍을 찾아가 안사람과 걸으며 내가 살던 집,학교를 보여주었다.
대문과 행랑채는 없어지고 마당은 수집해 놓은 고물들로 가득했어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바둑이"가 흙을 파던 마루도 그대로 였다.
앞마당에는 벌목업을 하던 큰아버지께서 사놓으신 휘발류 드럼통이 가득했었다.
뒤안에 있던 감나무는 없어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고물상집이 되어버려 마음이 언잖았다.
손바닥만한 사거리 위에는 제일 의원이 있었는데 어릴 때 약골이었는지 병원에 자주가던 기억이 난다.
항아리 손님을 앓아 목을 칼로 째고 고름을 빼고 붕대로 목과 머리를 칭칭 감고 아버지 등에 업혀오던 던 날 길에서 만난 동무가 아프냐고 날보고 물었다.
"응,항아리손님때문에 목을 쨋다"
주사를 맞은 뒤 아파서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가는 것이 행복했고 새하얀 붕대가 자랑스러웠던 나다.
지금 햇수를 따져보니 아버님 나이 서른 일곱이셨다.
하선정씨가 하시던 방앗간을 들여다 보았는데 그곳에 방앗간이 있었다는 유년의 기억뿐 어떻게 생겼는지는 처음 보았다.
어릴때 공장을 그리면 삼각형 지붕을 한 건물을 그리곤 했는 데 두칸짜리 삼각형 지붕이 있는 건물이다.
빛바랜 누런 벽이 언젠적 시멘트 색갈이었는지 수십년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도 방앗간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고추빻는 기계도 있고 50여년의 세월동안 없어지지않고 방앗간이 존재했다는 것이 놀랍다.
아마 지금도 손님이 오면 방아기계가 돌아 갈 것이다.
나이드신 주인은 옛 주인이 하선정씨였다는 것을 기억이나 할까?
어린 시절 간혹 여성 월간지를 통해 하숙정,하선정 요리 교실을 보며 고향에 사셨던 분으로 늘 기억해 왔다.
어머님도 가끔 말씀하셨었고.
어느 날 월간지에 박희지-하숙정씨 따님으로 소개된 사진을 처음보며 익숙한 이름이지만 처음 대하던 얼굴을 보던 때가 언제였던가.
이제 따님도 할머니가 된 누나의 어릴적 친구여서 하선정씨는 어머님에 비하면 장수하셨다.
돌아가셨어도 "하선정 젓갈"이란 실명 상표 브랜드를 남기셨다.
어린시절 이웃에 사셨던 분이어서 만나지 못했어도 가깝게 느꼈던 분이었는데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소식을 접하며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