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철학적 이해
성 염 (서강대 철학과)
철학, 죽음을 준비하는 예술
“난 어둠 속에서 그분에게 외치면서도 가끔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아마, 아무도 없을지도 모르지.”
“정말 그렇다면 삶이란 끔찍하게 무서운 일이죠. 눈 앞에는 죽음이 있고 만사가
허무라면 누가 살 수 있겠습니까?“
“대개는 죽음도 허무도 생각하는 법이 없지.”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야 그 어둠을 바라보게 되지요.”
잉마르 베르그만이 감독한 『일곱째 봉인』(1957년작)에서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크와 죽음의 사자가 고백실 창살을 사이에 두고서 나누는 대화이다.
일찌기 플라톤은 철학함을 죽음을 준비하는 예술이라고 하였다. 철학하는 사람은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사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로마의 스토아 철인 세네카는 "사는 방법은 일생을 통해서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상으로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겠지만 평생을 통해서 배워야 할것은 죽는 일이다"라고 설파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끝장나버리는 죽음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약 죽음이 무의미하다면 삶 전부가 무의미해지리라는 우려에는, 우리 모두가 잉마르 베르그만처럼 심각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죽은 다음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그리스인 디오게네스의 말은 위안이 되지 않고, "아직 삶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리요?"(未知生 焉知死)라는 공자님의 말씀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죽음을 바라보는 철학적 시선들
서구에서 유대-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배경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무신론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불가지론자들에 이르기까지의 사유는 다음과 같은 시선들로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먼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이치를 수용해야 한다면서, 영혼이 감옥인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면서, 어차피 죽음은 전생이나 이승에 저지른 죄값 또는 업보라면서 체념하는 달관적 자세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 AD 1세기)의 말이 대표적이다.
죽음이 악이라고 느껴질 때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생각하라! 악을 피하
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나로서 어쩔수없
기 때문이다. 내가 죽음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다만 당당한 소리로
“나는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떠나련다. 어떤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타인에게
주기 위해서 나는 떠나련다. 내 비록 실패하더라도 남이 고귀한 행동을 하는 것까
지는 질투하지 않겠노라“라고 말할 수는 있지 않은가? (에픽테투스, 대담 2.7.3)
두 번째로, 똑같이 초연함을 견지하면서도 사후 생명이라는 위험스럽고 부적절한 환상으로 자기를 기만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은 무(無)를 향한 맹목적 돌진일 따름이라고, 어차피 죽음은 끝이요 모든 것의 종말이요 내 존재와 모든 성취의 무화(無化)이며 마지막 결정적인 파괴라는 환원주의(還元主義)도 많은 생철학자들에게서 관찰된다. 죽음은 무시해버리거나 내 손으로 앞당겨버림으로써 죽음의 ‘가시’를 피하자는 태도인데 스피노자(B.Spinoza: 1632-1677)가 "자유인은 삶만을 명상한다!"는 명제를 내세워서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죽음에 대한 사색을 거부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명제 67: "자유로운 사람은 전혀 죽음을 생각치 않는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
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증명: "자유로운 사람은, 즉 다시 말하면 이성만의 명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선을 욕망한다.
즉 다시 말하면 자기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 살며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
신의 지혜는 삶에 대한 명상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명제 67)
세 번째로, 에집트의 피라밋에서 시작하여 우리 겨레의 초혼(招魂)이나 제사에 이르기까지 인류 거의 대다수가 품어온 꿈, "인간에게는 불사불멸하는 무엇이 있다"는 신념이나, 만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나는 죽지 않는다"는 심리적 확신이 어디서 나오는지 탐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이 죽어 무덤에 묻히거나 화장장에서 불타버리는 신체는 소멸될지라도 인간에게는 불사하는 존재양식이 지속하리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은 주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지금까지도 지성인들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고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이 책에 그려져 있다.
자! 나는 그대들에게 참 철학자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고, 또 죽은 연후에는 저 세상에서 최대의 선을 얻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오.... 죽음은 영혼과 신체의 분리가 아닐까?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이 분리의 완성이 아닐까? 영혼이 신체를 떠나 홀로 있고 또 신
체가 영혼을 떠나 홀로 있으면, 이것이 다름아닌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면 영혼은 언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일까? 신체와 더불어 무엇을 탐구하려
하면 영혼은 속을 것이 뻔하니 말일세. ... 참 철학자들만이 도대체 영혼을 이와
같이 해탈시키려고 하는 것이야. 신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와 해탈이야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고 실천하는 바가 아닌가?...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신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철학을 연구하고 신체를 완전히
해탈하여 순수하게 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요, 그밖에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일일세. (플라톤, 파이돈, 64a-82c)
끝으로,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남의 죽음”은 객관적인 사건으로 지나가지만 정작 죽음이 나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될 적에는 문제는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한다.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고서 제삼자에게 증언할 수 없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죽음을 체험할 사람도 없다. 나의 죽음이 띠는 주관적인 객관성 때문에 죽음을 정면으로 사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인간에게 시간성, 유한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보면서도 죽음은 생명이라고 일컫는 프로세스의 종국(終局)이니까 그 마지막 순간도 “인간답게 살아가야” 한다면서 도전하는 실존주의자들도 만난다.
하이데거(M.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있음' 또는 `죽음에 붙여진 존재'(Sein zum Tode)라고 규정한 철학자이다. 죽음은 실존의 한계를 보여주는 지평선(地平線)으로서 이 지평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무(無), 그야마로 허무(虛無)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허무에 대한 이 의식은 염려와 불안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삶의 고뇌가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 존재가 "죽음을 향해 있음"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실존은 죽음과의 관계를 통해 방향이 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을 향해 있음"은 우리 존재가 삻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출발점이 되고 또 어쩌면 의미가 가능해지는 조건일지도 모른다. 인간 현존재(現存在)는 태어나자마자 자기 죽음에 넘겨져 있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자기 죽음을 향하여 존재하면서 끊이없이 죽어가는 가운데 항상 이러저러한 실존적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다운 죽음
우리는 여기서 하이덱거의 실존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시각에서, 인간을 총체적으로, 영원히 파괴해버리는 이 생물학적 사건을 가장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교 철학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는 이 종말이 `인간의 죽음' 또는 `인간다운 죽음'으로 정립될 수 있는 논지를 개진해 보고자 한다. 죽음 앞에서 실존적 결단을 요청한 하이덱거의 착상은 위대하지만, 우리는 그의 사상에서 죽음 자체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무엇이 되어버리는, 마치 죽음이 하느님처럼 되어 버리는, “비극적 영웅의 철학”을 감지한다. 실존적 인간의 가장 위대한 결단이 결국 무를 향하고 허무로 끝나버린다면 인간 실존의 가장 숭고한 실재가 허무가 되고 만다. 그의 철학에서 존재(存在)와 무(無)가 동치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글의 본론처럼 소개하는 다음 사조는 그리스도교 철학유산을 간직하면서도 칸트와 하이덱거의 철학적 성찰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데서 얻어진 결실인데 대표적인 몇몇 사상가들은 철학과 신학을 넘나든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철학적 사변과 결론이 지성의 유희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삶 곧 종교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학문적 성실에서 유래하는 현상임을 독자들이 이해하면 좋겠다. 죽음은 지적 사색으로 풀 수수께끼가 아니라 혼신으로 매달려야 할 신비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인간’과 ‘세계’(세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개념정립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인간이란 자연본성(自然本性)과 위격(位格)의 합일체요, 위격적이고 자유스러운 정신과 물질적인 육체의 결합체, 간단히 말해서 육화(肉化)한 인격(人格)이다.
살아있는 육체가 곧 인간이므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흔히 나누어 개념하는 정신과 육체는 단일한 인간 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체적 결합(實體的結合)을 이루고 있다. 즉 단일한 실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質料形相論)을 빌려 설명하자면 마음 혹은 정신 혹은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anima forma corporis). 정신이 물체를 형상화(形相化)하는 이상, 정신이 갖는 육체와의 관계는 인간의 본질이고 육체와의 관계를 상실한 정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혹은 세계란 나그네 인생이 전개되는 무대도 아니고 인간의 정복대상도 아니고 인간의 세계다. 인간은 곧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이고, 실재의 총화(總和), 역사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 신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을 모두 망라하는 총화이다. 이러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입각해서 우리는 죽음을 표현하는 가장 범속한 명제들에 철학적 깊이를 부여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해 볼 수 있겠다.
① “모든 사람은 죽는다, 예외 없이!“
첫째로 죽음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유기체이므로 죽음은 극히 자연스럽고 유한한 생명에는 으레히 닥치리라 예상되는 종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하는, 원초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든 인간은 유한하고 사멸할 존재로 창조받았고 죽음도 창조의 일환이다.
이 명제는 단순히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경험적인 귀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과학자들이나 의료인들은 죽음을 "아직 해결을 못본 생물학적 문제(problem)" 정도로 간주하며 따라서 과학의 발달(회춘의약, DNA 연구로 질병예방과 노화방지, 복제인간에 의한 장기대체 혹은 개인대체)로 언젠가 해결을 보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다.
그렇다고 죽음을 생명과정의 필연적 부분으로만 간주할 수도 없다. 아무리 죽음이 '자연적' 과정에 일임되었더라도, 죽음의 보편성과 필연성에 관한 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근거들을 발견한다치더라도, 인간 실존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 죽음에 반항하는 이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당사자의 종교적 철학적 이념적 소신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기 생을 종결짓지 못하고 온 유기체와 정신력의 반항 속에 죽음을 맞는다. 프로이트 말대로 “내심에서는 아무도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인간은 자기의 불사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인류의 가장 무서운 이 집단적 착각, “나만은 죽지 않는다.”는 신념이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철학자들보다는 종교인들이 문제의 개연성 있는 해답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미래를 전부 망라하여,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고 실제로 죽으면서도, 인간은 자기가 당하지 않아야 할 죽음, 또는 당해서는 안될 형태로 죽음을 맞고 있다고 의식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죽음의 이유를 동서고금을 통해서 '죄값'으로 풀이하는 사조가 생겨났다.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인들의 해석은, 신 또는 존재근거는 생명 자체이거나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이므로, 생명체들의 죽음의 원인일 수 없다는 뜻이다. 진화하는 세계, 유기체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는 죽음은 필연이다. 따라서 죽는다는 그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는 양식이 죄의 결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 '자기의 죽음'인 동시에 인간의 무력함이 가장 처절하게 드러나는 사고이기도 하여 이 무력감이 저 많은 종교와 인간 상식이 죽음을 죄값으로 보는 견해를 낳은 것 같다.
② "죽음으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이 명제에 철학적 깊이를 부여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물학적이고 현상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으로 “혼이 나간다” 또는 “영과 육의 분리"라는 고전적인 명제를 거의 전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데, 이 범속한 명제는 “인간의 정신적 생명원리가 죽음으로써 육체라는 것과 전혀 새롭고 전혀 다른 관계를 갖는다"는 뜻으로 해명될 수 있다. 영혼이 하나의 생명단자(生命單子)로서 "육체라는, 세계의 일정한 시공점(時空点)과 가져오던 관계를 청산하고, (원래부터 영혼이 갖고 있던) 전우주적 세계 관계가 드디어 현실화되는 것이 곧 죽음이 아닐까? 즉 죽음이 인간의 실존을 비우주적(非宇宙的 a-cosmic)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우주적(全宇宙的 all-cosmic) 존재양식으로 만든다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실제로 죽음은 공동체에서 일어난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에워싸여 임종하는 가장이든, 공권력에 의해서 처형당하거나 범인에게 살해당하는 사람이든, 전쟁과 사고와 재난으로 떼죽음당하는 경우든 죽음은 사회공동체에서 발생하므로 공동체가 그 의의를 해석해주고(자연사니 비명횡사니 순국과 순교와 순직으로) 공동의 삶에 통합해왔다.
그래도 죽음은 인간을 공동체로부터 배우자, 가족, 혈연, 우정, 사회로부터 분리시킨다, 그것도 영구히! 이웃 인간과 대자연과 그리고 신과의 관계를 와해시킨다. “죽음의 가시”는 개인적 생명과 더불어 공동체 생명을 상실하는, 그것도 영원히 상실하는데에 있다. 죽음은 그 모든 인연과 관계를 깡그리 파괴해버리는 사건으로 비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번뇌를 동물적 공포나 감정적 미숙이나 신앙의 결핍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랑에서, 생명에 대한 사랑, 인간들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고,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 이 관계이므로 이 불안은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영혼은 다른 영육체들의 생명의 기저(基底)가 되는, 전체세계의 공동규정소(共同規定素)로 변화하는 것이다. 사람이 목숨을 바쳐 타인과 나라와 역사에 이바지한다는 깊은 의미를 여기서 추출할 수 있겠다. 어린 자녀를 두고 숨거두는 어머니, 무력한 가족을 남기고 죽는 가장, 정의사회를 위하여 투신하다가 게릴라전선이나 사형장이나 학살현장에서 피살당하는 의인(義人)들이 죽는 순간,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한반도의 역사의 저변으로 스며들어가서, 살아남은 자들과 더불어 그 삶과 역사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활력소가 되리라는 희망이 왜 불가한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교에서 그 창시자 나자렛사람 예수가 인류를 구원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도 아니고 역사상의 베스트셀러 성경에 기록된 고귀한 말씀으로도 아니고 기막힌 기적으로도 아니고 본인의 죽음으로였다고 믿는 것은 그 범례가 되겠다. 죽음에서 구원이 오다니!
③ "죽음은 나그네 인생의 종료이다"
그러면서도 죽음은 각자의 삶에서 부닥뜨리는 참으로 유일무이하고 개인적인 사건이다. 유한한 존재체험(存在體驗)을 궁극적으로 맛보게 만드는 이 사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그 체험의 의미와 목적을 응시하게 만든다. 삶의 종국을 대면하면서 누구나 자기 삶의 전체적 맥락을 회고하면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여기 행복하게 발랄하게 전개되는 나의 존재에 죽음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두고, 아니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간부터 어쩌면 삶과 죽음의 본연의 의미를, 창조적 의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로지 파괴적으로만 서술되는 죽음을 두고 하이덱거는 죽음의 적극적 역량도 제시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죽음에 붙여진 인간만이 “책임있는 자아의 창조”를 할 수 있고, 지금 여기서 내가 행하고 있는 관심과 행위를 그 창조에 비추어 평가하고 판단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 자체(dying)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죽음이 "나그네살이의 종료"라면, 그것은 인간이 죽음에 임하여 비로소 가장 밝고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인격적인 행동을 통해서 자아긍정(自我肯定)을 종결시키는 최종결단(最終決斷)을 내린다는 의미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죽음을 맞으면서 "한 인간이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에 도달해 있던 실존적 자세, 그가 존재근거와 역사와 타인들 앞에 과연 자기를 개방하느냐 폐쇄하느냐 하는 인격적 결단에 결말과 완료를 초래한다."는 뜻이 아닐까?
이것을 소위 '최종결단설(最終決斷說)이라고 통칭한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즉 전생애를 통해서 항상 단편적인 시간의 맥락, 단편적이고 애매모호한 조건하에서만 결단을 내리고 자신과 타인의 실존을 성취한다. 그러다가 죽음 '속에서'는 인간이 최초로 전인적 행위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드러난다. 일평생 누려보지 못한 밝은 빛 속에서 사건과 의미를 관찰하고 더할나위없이 자유로운 처지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다. 이로써 죽음은, 가장 완벽한 의식화(意識化)가 이루어지고 가장 자유로와진 상태에서 신과 타인과 역사와의 진솔한 대면과 영원한 운명의 결단을 내리기에 가장 뛰어난 존재적 장(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태양과 죽음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죽음은 인간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를 구원한다.”(E.M.포스터)고 하듯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삶에 관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글에서 강조해온대로, 생명에 죽음이 포용되어 있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바라보도록 초대하는 작업이 종교인들이나 철학자들에게 기대된다. 철학적 인간학 수강자들에게 “그대에게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이 주어지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적에 나오는 대학생들의 응답으로 미루어, 임박한 죽음은 삶에 진지함과 깊이를 부여한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죽음이 그렇게 일찍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이 멀리있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느껴져 삶이 부패되고 나태해진다. 죽음과의 만남을 약속했을 때 인간은 보다 개선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W.카우프만). 죽음과의 약속에서 삶은 아주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소중한 하나의 선물이며 밖으로부터 온 선사품임을 체험한다. 죽음에 위협받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삶은 아주 귀중한 것, 반복될 수 없는 모험으로 간주된다. 죽음에 입각하여 비로소 삶은 '인간적'이 된다. 철학이 죽음을 거론하는 명분이 여기 있다.
이 글에서 죽음(death and dying)이 너무 아름답게 묘사되었는지 모른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설명이 어떻게 나오든 산에, 죽음은 여전히 인간이 접할 수 있는 가장 짙은 어둠이다. 죽음은 여전히 생물학적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종말이다. 죽음은 일격으로 인간 전체를 붕괴시키며, 외부로부터 인간을 맹타한다. 죽음은 하나의 파멸이며 갑자기 외부에서 덮치는 사고이다. 그래서 여전히 죽음은 인간의 경험에는 완전히 감추어진 영역이다. 사멸할 존재들에게는 절대 들여다 볼 수 없는 신비이다. 죽음의 이 어두움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더없이 적나라하고 인간다운 자세를 당사자와 철학도들에게 요구한다고 하겠다. 종교적 표현으로는 인간의 구체적인 죽음이 영원한 구원이 되거나 영원한 파멸이 된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을 연 채로 이 신비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실존적 귀의(實存的歸依)”밖에 취할 것이 없다. 그밖의 다른 태도는 불가능하여 죽음의 신비는 철학에서 머물지 못하고 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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