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선교장-오죽헌-감추사

Jay.B.Lee 2012. 9. 22. 07:36

 

사진:활래정(活來亭)-궁중을 제외한국 최고의 정자로 간주한다.

선교장-전에 방문시 공사중이어서 제대로 보지 못한 선교장이다.연꽃이 피었다면  운치를 더했을 연못이다.

선교장 규모로 보아 왕손이긴하나 효령대군 10대손이면 권력으로 돈을 번 것도 아닐 것이다. 

충청도에서 올라와 타지인 강릉에 정착하여 어떻게 부를 이루었는지 궁금했다.

이곳에 옮겨온후 소금이 비싸다는 걸 알고는  염전 대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팔아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한다.

 

원래 연못 한가운데 있었던 정자대신 후손이 "ㄴ "자 정자를 지었다.풍류객들이 시문을 나누고 즐기던 곳이다

자손으로도 업적을 남기고 싶었고 귀빈을 모시고 싶은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선교장을 방문하게 되면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안채

 

 

열화당(悅話堂:큰 사랑채)

앞 건물은 처음엔 행랑채로 사용하다 나중에 과객용 숙소로 사용했다 한다

열화당 안의 글씨는 낙관이 없다. 열화당(서재에 해당)에 온 손님중 한분이 써 놓은 현판.

천정에에 매달린 것은 방문을 들어 거는  걸쇠대신 중간에 끼게 만든 특별한 구조다. 

열화당 내부의 대들보 크기가 어미어마 하다. 금강송 이다

 

 

 

 

 

 

만석꾼의 창고

 

 

현판들은 이곳에 묵었던 선비들이 밥값을 하고 간것.

왼쪽 건물은 중사랑채.

열화당의 앞 부속 건물은 러시아 공관에서 열화당(悅話堂)에 지어준 러시아식 양식이다. .

아마 비바람을 막기위해 실용성을 강조하며 건물에 크게 조화를 깨뜨리지 않게 신경을 쓴 건물이다.

덕수궁에 가면 고종이 사용하던 건물 양식과 같은 러시아 양식으로 지었다.

러시아 공관들이 묵고 간 감사의 표시라지만 옛날 대관령을 넘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궁금하다.

 

 

안방 마님들의 거처인 안채 주옥.

 

사람이 많았을 때 객식구가 3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너무 오래 머무는 과객에겐 반찬 순서를 뒤바꿔 놓는 등 눈치를 주어 보냈다 한다.

인심 좋은  만석꾼 노릇도 힘들었겠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궁궐보다 작게 99칸 집의 규모로 지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으나 편법으로 회피하듯 지어 99칸 저택의 의미는  크게 없다.

  나중엔 그냥 큰집을 99칸 집으로 불렀고 큰 부자면 만석꾼,작은 부자라면 천석꾼이라 불렀다.

백마지기 농사를 지었다면 중농에 해당되어 남에게 크게 굽신대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

 

 

배다리 마을을 한자로 선교(船橋)로 부른 것으로 옛날엔 경포호 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다리대신 배다리를 이용해서 건너다녔다 한다, 

정조도 수원에 가면서  배다리를  이용 한강을 건넜다 한다

"오죽헌"의 수백년된 배롱나무

율곡이이가 자라며 보았을 소나무 .천재인지라 소나무에 대한 한시를 지었다.

 

 

 

 

 

 

 

 

동해시"감추사'가는 길.감추사의 아담란 해안 바다를 보고 싶었다.

차는 철로 옆의 주차장(무료)에 주차하고  좌우 기차가 오는지 살피며 사진의 오른 쪽 끝까지 가서 바다를 향해 내려가면 된다.

 

U자 형태의 바다가 보이고 작은 모레사장이 있다.태풍에 떠내려운 해초가 산더미 처럼 쌓였다.

 

스노클링 안경을 쓰고 물속을 헤메고 다니기 좋은 바다속이다.

 

 

 

                 오랫만에 보는 꽈리 .

 

 

               

 

해안을 가장 잘 볼수 있는 위치는  기도처 건물 창문이다.

기도처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지 않는 한 해안 전체를 사진으로  담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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