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Homer B. Hulbert)-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Jay.B.Lee 2012. 7. 17. 07:14

 

사진:양화진에 묻혀 있는 Homer B, Hulbert(1863-1949)의 묘비

."양화진외국인  선교사 묘원"중앙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제일 먼저눈에  들어오는 묘비가 있다.

 

죄송하게도  오랜 知人인 김동진 씨가 지은 책을 증정해 온지 일년만에 책장을 열었다.

사실 어슴프레 헐버트(미국) 를 기억하고 있던 나다.

 

<헐버트는 "한국의 은인","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그는 23세때 국립 육영 공원(학교)의 영어 교사로 처음 한국에 와 5년동안 교사 생활을 한후 귀국했다가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왔다.

헐버트는 주로 문서 선교에 헌신 했는데 그가 한국에 관해서 쓴 글들은 한국을 외국에 알리는 창구가 되었으며 그는 1903년에 창설된 한국 YMCA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헐버트는 특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고종 황제의 밀사로 시어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적인 도움을 호소했으며,1903년에는 고종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를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적 통로로 활용하기를 권고하여 이준등 세사람을 밀사로 파견토록 하였다.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으로 부터 비자금을 독립 운동 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해 달라는 밀명을 받는 등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노력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후에도 헐버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헐버트는 광복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에 다시 왔다가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양화진에는 태어난지 1년만에 죽은 아들 (Sheldon Hulbert 1896-1897)도 묻혀 있다.>---양화진 묘지 안내문에서

 

.

              

1886년 7월 4일 23살의 나이에 미지의 세계 조선 땅 제물포에 발을 내디딘 헐버트.대학 졸업때의 사진(21세)

비석 옆면에는 묘비명은 당초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로 각인 하려 했으나 6.25전쟁등 나라의 혼란으로 묘비명없이 지나다 헐버트 서거 50주년을 맞아 김대중 대통령 글씨로 묘비명을 완성했다는 설명이 있다.

묘석의 옆면-헐버트가 감리교인임을 알 수 있는 표지판.

가운데"헐버트 박사의 묘"가  김대중의 글씨.

 

헐버트 박사의 묘로 나는 웨스민스트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한다(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외손녀 주디는 86살의 노인인 할아버지가 샌프란 시시코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할아버지 자신도 알고 가족도 알았다고 2007년 증언했다.- 책 387쪽

헐저트는 인천항 부두에 첫발을 내딛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의 노안에는 눈물이 맺혔다.

40년만의 귀환이라는 감격을 감출수 없었다.

헐버트는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조선의 흙내음인가! 63년 전 23살의 청년으로 처음 맡았던 조선의 흙내음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김 을한은 가까스로 헐버트를 일으켰다.-책386쪽

청량리 위생병원에 병원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헐버트는 1948년 8월 5일 정오 조금 지나 임종했다

영결식은 외국인 최초 사회장으로 1949년 8월11일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을비롯 3부 요인과 각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여 장엄하게 치뤄졌으며 영구차에는 많은 인파와 100여대의 차,10,000여명의 청년들이 뒤를 따랐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장지까지 직접 가서 작별 인사를 고했다고 한다.

*김을한 (1905-1992):언론인.일본 유학시 요코하마 고서점에서 구입한 "The Passing of Korea"(대한 제국 멸망사:헐버트 지음)를 읽고 감화되어 1949년 헐버트의 還國을 추진하였다.

 

*김동진: 국제 금융인.전북 진안 출신,1948년 생으로 Chemical Bank 서울 지점 부지점장으로 근무하다 1989년 뉴욕 본점에 근무했다.

나중에 은행 합병에 따라

Manufacturers Hanover은행 서울 지점 근무,Chase Manhattan Bank 한국 대표,J P Morgan Chase 한국 회장,한국 외환은행 부행장,PCA 투신 운용(주)대표이사등을 역임.현재 헐버트 기념 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Homer Bezaleel Hulbert의 일생*

1863.1.26 :미국 버몬트 주 New Haven시에서 목사이자 미들베리 대학 (Middlebury College)총장이셨던 아버지 칼빈 헐버트와 Dartmouth College창립자 후손인 어머니 메리(Mary E.Woodward)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남

1884         :다트머스 대학 졸업,유니언 신학대학 입학 2년 수학

1886.7.4    :육영 공원(Royal English college)교사로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딤

1891;교사 계약이 끝난후  미국으로 귀환

1893:감리교 선교사로 재 내한 (삼문 출판사 책임자)

1895:영문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 운영 책임자및 공동 편집인

1895: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직후 언더우드,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권총을 가지고 불침번을 섬

1896:서재필을 도와 최초의 한국 독립 신문 창간에 공헌

1903;한국 YMCA 창립 준비 위원장및 창립 총회 의장

1905: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출간

1905;을사늑약을 저지코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황제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 미국 방문

1907-5~7월:고종 황제의 특사로 헤이그 방문,한국인 특사 지원

1907 7:일본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가 매사츄새츠 스프링 휠드에 정착

1919:서재필이 이?ㄲ는 미국의 한인 독립 단체 "한국 친우동맹"및 이승만이 이끄는 구미 위원회(The Korean Commision to Ameroca and Europe)에서 중심 연사로 활동.

1948;아내 May b. Hulbert 별세

1949.7.29 대한 민국 초청으로 8.15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

1949.8.5: 내한 일주일 만에 서거

 

 

 " 학창시절 책을 통해 헐버트박사를 처음 만나 이래 지금껏 항상 체증처럼 자리한 멍울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의 문명화와 독립을 위해 그토록 큰 획을 그은 헐버트 박사의 이름이 이 땅에서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이대로 둔다면 그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조바심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헐버트 박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은 하나의 사명이 되었다.

 

우리 주위에는 아름 다운 감동의 삶을 살다 간 사람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감동의 삶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참으로 가치있고 귀감이 되는 삶이 있다면 ,그 삶을  재조명하여 후대에 남겨 주는 것이 기성 세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중략

헐버트는 육신은 이방인이었지만 정신은 한민족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한 평생을 한민족과 함께 호흡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모국을 비난까지 하면서 불의에 고통받는 민족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다.

그는 지식과 인격을 겸비한 지성의 모범이었으며 ,확고히 정립된 가치관 속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신념과 용기를 가진 행동가였다.

 

헐버트의 정신과 사상

첫째,그는  한국학의 대가이자 민족주의자다.

둘째,그는 위대한 교육자이자 계몽주의자이다.

셋째,그는 정의를 실천하는 평화주의자이다.

넷째,그는 원칙을 지키는 합리주이자이다.

다섯째,헐버트는 박애주의자이다.

 

헐버트로 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첫째,그는 누구보다도 폭 넓은 지식의 소유자였다(Knowledge)

둘째,그는 항상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었다( Professionalism)

셋째,그는 매사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었다.(Passion)

넷째,그는 도전 정신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Challenge and courage)

다섯째,그는 창의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Creativeness)

여섯째,그는 어떤 일에 몰두하면 마치 눈으로 응시하여 차돌을 뚫듯 무서운 끈기를 발휘했다.(Tenacity) 

일곱째,그는 따듯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Big Heart)

여덟째,헐버트는 명예와 신의를 존중하였다.(Reputation)"-김동진

 

헐버트는 조선의 학생-관료 자제에게 서양식 악수를 처음으로 가르쳤다.

조선 사람들이 서방세계-러시아,일본 ,청나라이외의 세계를 알도록 사민 필지(士民必知)를 저술 세계지리,풍습,정치제도 ,종교,교육,군사력등을 설명하였다.한글은 발음 기호가 필요없는 우수한 글자임을 주장했다.감리교인이면서 장로교 ,천주교 신부까지 초교파적으로 협동하였다.언더우드,아펜셀러와 친구였으며 뜨거운 동지였다.언더우드와 협조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협력, 공헌했다.

미국 대학 총장직 자리 제의도 거절한채 조선에 다시왔다.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소설 "천로 역정'을 출판했다.동대문 교회 2대 담임 목사로 감리교 사상 처음으로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한국 개신교 최초로 세례식을 행했다 YMCA창립 초대 회장을  역임 했다.

"한국은 문화의 보고요 한국인은 학문을 숭상하는 민족"이라고 정의한 그는 한글의 참가치를 발견한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한글 사랑-그는 한글을 배운지 4일만에 한글을 읽었다.한글은 대중 소통의 매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며 1903년 세계 유명 학술지에 발표,스미스 소니언 협회에 연재했다.주시경과 함께 한글 띄어쓰기와 마침표 사용 사업 추진 ,공헌하였다.

한글은 '소리를 표현하는 힘의 일관성에서 한글보다 더 나은 문자는 없었다'고 했다.(당시 전세계 사용언어 6912개,문자없는 언어 2,500여개)

아리랑에 최초로 서양 음계를 붙였으며 시조  "청산아'와 경기민요 '군밤 타령"에도 음계를 붙였다. 헐버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구한말 우리나라에 두가지 영문 월간지를 간행했다.쌀 농사가 다른 농사보다 4-5배 힘이든다고 했다.1927년 한국 전래 동화로 "엄지 마법사"를 썻다.

그는 "대한 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런던 출간)"를 저술하였으며 "고종과 한민족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고 헌사를 썼다.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나 결코 죽음 자체는 아니다".

장차 민족 정기를 살려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설 것으로 100년전 예견하였다.

그는  한민족의 강점으로"  "한국의 유산은 독창적이고 토속적이며 중국과 닮은 것은 예외일 뿐"이라고 했다.

교육 투자에서 가장 성공 할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며 한민족은 합리적이며 우호적이며 한번 결심하면 절대 포기 않는 근성을 가진 민족이면서 민족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와 '관료들의 이기적인 태도'라고 설파했다

 

 

 

100여년전 헐버트가 본 한민족과 오늘날 우리와도 별 차이가 없음은 놀랄일이다.

한사람의 삶이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있을까.

한국인인 내가 내나라를 그처럼 철저히 사랑할 수 있을까.

그가 감리교 기독교인인 것을 알겠지만 신의와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끝없는 용기와 정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의 삶을 추적,우리나라가" 보은을 아는 문화 민족"으로 인식 시키고자 민간 외교의 역할을 꾸준히 해 나가고 있는 헐버트 기념 사업회 김동진 회장에게 존경과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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