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사라질뻔 했던 나라

Jay.B.Lee 2010. 2. 10. 07:38

"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은 어차피 슬픈 일이지만 신화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길고 ,

찬란한 과거의 기념비로 가득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은 더욱 슬프다"

-* 헐버트)목사

* Homer Hulbert(1863-1949)

1949년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가 일주일 만에 병사.

   합정동 외국인 선교사 묘지 안장 되어 있다.

그의 묘비에는 유언이 적혀있다.

"나는 웨스트민트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에 내 뼈를 묻겠다.

 

 

코리아를 중립화 시키려는 내 구상은 자취도 없이 스러져 버렸다.

물론 나는 황제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자주,그리고 상세하게 나의 단순한 구상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 가엾은 분은 그것의 기본적인 개요도 파악하지 못했다.

-*샌즈

*William F. Sands(1874-1946)

미국  워싱톤  출생.조지타운 대 법학과 졸.할아버지,부친이 대통령 국무총리들과 교분이 두터운 명문가 출신

20대에 칠레 1등서기관과 일본 2등 서기관 중 하나를 제안 받고 일본 2등공사로 근무후 1898년 (24세)1월조선 외교관으로 부임.

러일 전쟁(고종 41년) 발발시까지 고종의 고문관으로 재직.

1901년 (고종 38년)제주 민란이 일어나 강화 진위대10명과 함께 제주에 파견,민란을 수습했다. 

1904년 미구구국무성으로 귀국 파나마 외교관을 역임.

1920년 부터는 정년까지 조지타운 대학교 역사,외교사 교수로 재직했다

조선에 관한 저서로 Undiplomatic  Memories가 있다,조섬ㄴ의 마지막 날,조선 비망록이란 책명으로 발간 되어 있다.

조선에 큰 족적도 해악을 끼치지 않은 인물이며 후임자로 온 스티븐스

(일본의 통감정치를 찬양 한 것에 분노한 전명운,장인환 열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저격 살해)를 암살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격전장이었던 평양 모란대의 솔밭은 총탄에 맞아 성한 가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문명의 창시자로 알려진 기자묘의 기둥에는 총탄에 맞아 벌집처럼 되어 있었고 그 마루 바닥에는 피가 엉켜 오싹하였다.

아마도 부상자를 뉘여 놓은 것 같다.

의주로에는 아직도 수백명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으며 웅덩이란 웅덩이는 시체로 메워져 있었다

논밭에는 총,당우산,당 부채,군모,검,탄대등이 흩어져 있었으며

총소리에 놀라 도망쳐나온 주인잃은 개들이 머문 곳에는 토막난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비숍 할머니 (청일 전쟁 이 끝나후평양의 전쟁터를 본후)

조선은 러시아 ,중국,일본 사이에 놓인 "셔틀 콕"과 같은  신세다.

그러나 "은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은 "길이 번영할 민족"이다.--비숍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영 북부 요크셔 출생.19C 여행가

1856미국에 간 영국 여인,1875 하와이 군도,1876 로키산맥의 숙녀,일본의 미개척지를 찾아서,

말레이지아 영행후 황금 반도를 찾아서,1891 페르시아 와 쿠르키스탄 여행기등을 썼다.

 여성최초로  영국 왕실 지리학학회 회원

1894년 조선 입국후 네차례 방문 1898년 <조선과 이웃들>이란 책을 썼다.

1899년 중국 여행후 양츠강 계곡과 그너머

1901년 모로코 여행  73세로 별세

 

 

 

 

조선의 백성들-어린애 처럼 천진 난만하고 나태한 -은 그 동안 속수 무책인채 손만 벌리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국왕과 황태자를 거의 일년 씩이나 가두어두다시피했을 때에도 ,

행동으로 나서서 멍에를 벗겨버리기는 커년,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못한 가련한 백성이었다.

 외교 사절단이 조의를 표하는 동안 나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 볼수 있었다.

황제(고종)의 얼굴은 개성이 없었으나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

눈은 상냥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작았고 사팔뜨기여서 시선을 어딘가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노상 허공을 헤매었다

노란 색 옷차림에도 서양의 Night Cap(밤에 잘 때 머리칼 헝클어 뜨리지 않으려고 쓰는 모자)과 비슷한 높은 모자를 쓰고 ,

성긴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렀으면서도 마치 상냥하고 늙은 목욕탕 아주머니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외교관들이 조의를 표할 때마다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굽히곤 했는데,

내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임금의 인상과는 사뭇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한 많은 황제에게 나는 일종의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임금의 옆에 서 있는 황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 보였으며,

입술은 두거워 육감적이었고 코는 납작했으며 넓은 눈섭사이로 주름 살이 움푹 패여 있었다.

노란  두눈을 신경질적으로 연방 깜박거리면서 한시도 쉴새없이 이곳 저곳에 시선을 돌려대었다.

아뭏든 전체로 봐서 인상이 돼지의 찡그린 면상을 보는 것 같았고 무슨 악독한 괴물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으며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아손 그렙스트

 *아손 그렙스트(W.Ason Grebst)

스웨덴 출신의 신문기자로 1904년 러일 전쟁을 취재하러 도쿄에 왔다가

일본 군부의 한반도 취재에 불허에 무역상으로 위장 코레아에 밀입국 했다,.

세계각국을 두루 돌아 다녔고 일본및 대만 풍물지도 쓴바 있다.

자유를 신봉하는 세계인이었다.

 

 

우리는 사라져가는 이 나라를 향해 애써 "대한 만세"라고 작별 인사를 보낸다

한 국가로서 이민족은 몰락하고 있다

마음이 따듯한 이민족에게 파도 너머로 작별 인사를 보낸다

지금 나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미리 한 민족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는 장례행렬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노베르트 베버

 *Norbert Weber(1870-1956)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리엔탈  연합회 대수도원장

1911년 한국을 방문 기행문을 모아 1914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발간.

1925년 재 방문하여  조선 전역과 간도 일대를 촬영  무성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 der morgen-stille)를 만들어

뮌헨 인류학 박물관을 시작 남부 100여개 마을에서 상영했다.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I fell with Korea)-조선을 떠나며 *알렌.

 

호러스 알렌 (1858-1932)

1894년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

연세대 세브란스 전신인 최최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설립.

조선을 배반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선교사 며 외교관,제중원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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