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어린시절의 영화편력기

Jay.B.Lee 2009. 1. 10. 08:52

 사진: High noon의 게리 쿠퍼

 

  지금까지 살아오며 보고 즐기면서 싫증을 느끼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구수한 된장국처럼 질리지 않고 즐겨온 것,나에게는 영화일 것이다.

그래서 살아오며 수 많은 신상정보 카드 취미란에 자신있게 영화 감상이라고 써넣을 수  있었던거다

 1953년,종전이 되던해  내가 다니던 동진 유치원은 충청북도 영동 이수초등학교 운동장옆에 있었고 학교에서 영화를 한다고 7살 위인 형을 따라가  컴컴한 운동장에서 스크린을 앞뒤로  주저앉아 앞뒤로 활동사진을 보았다.

흑백 활동 사진으로 십자가를 지고 끌며 힘들게 언덕을 오르던  사람 을  기억했다.

크면서 그분이 예수님이란 것을 안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 뒤다. 

그 영화가 무성이었는지 유성영화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내게 있어 영화와의 만남은 그것이 최초였고 첫 경험이었다.

 영동읍에는 12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는 철제탑이 있었는데 우린 그것을 "오포대"라고 불렀다.

지금도 영동읍을 지날 때면  로타리 옆에 서 있는 오포대를 본다.

여지 것 부서버리지 않고 잘 모셔둔 영동읍의 존경스러운 주민들이다.

그 부근인가  대충 가마니 비슷하게 담 을 두르고 하늘이 보이는 임시 가극장에서  초등하교 1학년때 동무들과 영화를 보았다.

그것이 두번째의 기억이다.

웨스턴 무비로  말타고 쫓아 오던 추격자들을 피해 도망하던 두사람이 산더미같이 쌓인 옥수수 속으로 숨어서 간신히 살아남던 한장면만 기억한다. 

배가 고픈 시절였던가 옥수수 더미가 왜그렇게 오래잔상으로 남아 있을 까.

처음 신기하게 본 본 총천연색영화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본 "변사"가 있던 영화다.

 

1955년 3월, 공무원으로 천주로  발령나신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 청주에 오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가족 모두를 데리고 '청주극장(청주의 방화 개봉관)"에서 "홀쭉이와 뚱뚱이 논산 훈련소가다"를  보여주셨는 데 난 그때 홀쭉이와 뚱뚱이가 양석천,양훈씨란 것을 처음 알았다.

홀죽이가 여장 을 하고 인민군을 꼬셔내고 양훈씨가 몽둥이로 두들겨 잡던  우스광 스러운 장면에 사람들이 웃던  순수한 시절이다.

그 영화의 몇장면을 TV에서 한국 영화 회고전에서 보았을 때 의 감격이란!

그 유치함에 웃엇던 나의 지난 시간이여,성장해가며 잃어버린 작은 행복들이여.

초등하교 3학년이 되면서 나는 학생 단체 관람으로 학년 전체가 영화를 갈 기회가 종종생겼다.

아버지께서는   영화 갈때마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돈을 주셨다.

학생 단체 관람교육이란 소풍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할수 있는 중요한  외부활동이었다.

볼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시절-도청옆 상공 회의소 건물전시장에서  충청북도의 수출 상품이라고 초라하게 놓인 텅그스텐 광석을 보고 온것이 주요 교육이 되던 시기였다

청주 도청옆에는  소위 "공보관"이란  부속건물이 있었다.

원래 공보관의 목적은 어디로 가고 영화전용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요즈음 단체건물의 강당이 결혼 식장으로 둔갑하는 것에 비하면 53년전 하나도 이상할 것도 없던 시절이다.

그곳에서 본기억나는 영화로는 피터펜,백설공주,아프리카 종단(다큐먼타리),사막은 살아있다.(다큐먼타리)등이 있다.

나는 영화관에 갈 때마다  꼭 싸움 직전 긴장감으로 전신주에 오줌을 싸대던 개들모양으로  화장실에 오줌을 찔끔 거리고 와야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서서히 그 증상은 없어진 것 같다.

영화 시작하는 종이 울리면  파라마운트의 별,20세시 폭스사의 써치라이트,,콜럼비아사의 횃불든 천사같은 여인, MGM의 사자 얼굴과 울음 소리가 나를 전율케 했다.

청주 극장에서는 "쌍무지개 뜨는 언덕"과 "검사와 여선생"같은 영화를 보았다.

공보관에서는 주로 서부영화와 액션 영화를 자주 상영했다.

4학년때 인가 청주 극장 건너편에 있는 현대 극장에서 "금지된 장난"도 보았다.

주제음악 "로망스"는 지금도 흔히  듣게 되는 유명한 음악이 되었고 그 어린 소녀가 후일 "시네마 천국"에서 중년 여인이 되어 재회 할줄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들이 출연한다하여 단체로 관람했어도 우리들이 전쟁의 비참함과 죽음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용돈으로 친구들과 서부활극에 심취하기 시작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미국의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줄줄 외웠다.

케리 쿠퍼,리차드 위드마크,버트 랑카스터,그렌 포드,헨리 폰다,빅타 마추어,커크 더그라스,어네스트 버그나인,아란랏드,오디 머피 ,안소니퀸,죤웨인 등등이다.

그중에 케리 쿠퍼는 나의 영원한 서부의 사나이의 우상이었다.

당시 영화에는 사나이를  부친 제목이 많았는 데 쓸만한 사나이가 한국에 귀한 시절이었나보다.

하이 눈,용서받지 못한자,빅 칸튜리,OK목장의 결투,황야의 결투,세인,베라크루스,건힐의 결투,론레인져,라라미에서 온 사나이,아파치,북소리등등 대부분의 서부극을 공보관(후일 동아극장으로 명칭이 바뀜)에서 섬렵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학교에 가서 영화본 얘기를 친구들에게 재미있게  해주었는지 당시 초등학교 동창이  기억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님을 따라 가족들과 함게 극장에 함께 갈 기회가 또 있었다.

"지난 여름 갑자기(*몽고메리 크리프트,엘리자베스 ,캐서린 햅번 출연)"를 관람 하였는 데 내가 본 영화중 처음으로 이해 할수 없던 영화였다,

당시 사촌 오빠가 북아프리카 여행중 현지인들에게 난도질당해 죽던 장면만 남아 있었다

 그영화를 다시보게 된것은 3십년이 지나서였고 어린 나이에 왜 이해를 할수 없던는지를 알게된 영화였다.

당시 게이,동성애,정신병, 죽음등은 어린 나에게느 너무 거북하고 부담되는 주제였다.

 

 

중학교에 다니는 나이가 되자 학생입장 불가에 신경을 써야 했다.

여학생들은  학생입장 환영 영화도 단체관람아닌 개별적 관람은  정학등 징계를 받아야 했던 무지막지하던 교육이 행해지던 시절이다.

 나는 당시 영화의 내용이 학생입장 불가라는 데 대하여 이해 할수가 없었다.

영화중 남녀의 키스 장면 ,베드 신 만 나와도 학생입장 불가였다.

 자연 스러운 사랑과 연애및 성교육에 둔감하다 보니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매춘이 대단히 성행하는 국가란   오명을 갖는 나라가 되었다.

중학생이 되고 차츰 세상을 배워가며 개척자인 백인을 괴롭힌 인디안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임을 알게 되었고 쌍권총이란 실제 사격을 할수 없는 장식용이란 사실을 알았다.

 총잡이들의 결투란 모두 허구이며 거의다 등에 총을 맞아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부 영화에 대한 흥미를 조금식 잃어갔다.

150~200여년전의 사진들의 개척자들이란 사진을 보면 거의 거지 수준인데도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뭐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부문이었다.

영화를 보고는 싶고 혹 학생 지도 교사에게 걸릴지도 모른다는불안감을 해소하기위해서는 학교에서 돌아와 즉시 옷을 갈아입고 극장에서 표를 산뒤 상영벨이 울리면  들어가 끝나자 마자 튀어 나오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학생으로 규칙을 잘 지키는  나였지만 영화만은 학생입장 금지도 가끔 구경하곤 했다.

영화관에서 나와 가끔 마주치는 친구가 있었는 데 그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

한번도 지도 교사를 만나적이 없었던 것은  그시간에 퇴근해  극장에 나와 있을 부지런한 선생님이란 없었던 거다.

지금도 학생입장 불가에 대해 입장권을 판매하고 극장에 넣어준 "기도" 아저씨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그분들이야 말로  문화와 예술에 굶주린 우리에게 단비를 뿌려주시던 선각자들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