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미국에 사는 사촌형 내외가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 갔다.
살다보면 해외에 사는데도 자주 만나게 되고 비교적 대화를 나누게되는 사촌들이 있는가 하면 국내에 사는 사촌인데도 결혼식장에서 십수년 만에 만나는 사촌도 생긴다.(우리집 5남매를 포함하여 모두 27명- 남자형제18명,여형제9명이다)
사촌형 내외가 근래 1,2년만에 한번씩 한국에 나오게 되면서 미국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많은 새로운 얘기를 들으며 사촌형 내외의 인생 전체를 들여다 본 기분이 든다.
누나 매형 내외와 우리 내외,사촌형 내외 모처럼 안면도 펜션에 묵으며 낚시도 하고 새우도 구워 먹으며 지난 삶을 더듬어 보며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35년전,사촌형은 국영기업체인 좋은 직장을 사직하고 작은 집을 팔아 부모님께 드린후 800불을 가지고 형수와 3살, 4살된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이민길에 올랐다.
한달여만에 돈은 바닥이 나고 일자리를 구하러 여기 저기 두드리며 다니던 막다른 골목에 선 입장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당시의 절박한 심정이 어떻하였을까?
영어를 못하고 외국인이 두려워 일하러 오라고 오던 전화조차 무조건 끊어 버렸다는 형수.
사촌형은 처음 일년은 자전거 부품 회사에서 일을 하고 그후에는 지금 말하자면 완전 3D업종인 도금 공장에서 5년을 보냈다고 했다.
섭씨 40도,50도까지 오르는 도금공장의 열기를 참으며 일할때는 죽을 맛이었다고 했다.
형수는 하혈을 하면서도 봉제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사촌형은 백인이란 한명도 없던 작업장에서 용케 5년을 버틴후 직업을 전환, 흑인을 상대로한 의류판매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 집도 사고 작은 빌딩도 사고 차츰 안정하기 시작했다.
아들들은 잘 자라 둘다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큰 조카는 하버드를 둘째 조카는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둘다 Lawyer가 되었다.
큰며느리는 이민 2세로 한국말을 잘하는 며느리를 얻었고 둘째는 싱가폴 중국계인 변호사인 며느리를 얻었다.
한번 가볍게 Stroke이 온뒤 건강을 회복하고는 은퇴를 결심, 주택을 처분하고 가구와 집기는 교회의 어려운 분들에게 나누어 주고 방하나와 거실이 달린 작은 콘도로 Downsizing하였다.
가게도 모두 처분하고 20년간 LA를 업무차 오가며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던 디즈니랜드와 그랜드 케년도 구경했다.
지금은 뉴저지와 시애틀에 있는 아들들의 집을 오가며 가끔 한국에도 나와 일가,친구들을 만나고 가곤 한다.
이민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확실하게 성공한 "이민자의 삶"이다.
고통의 긴세월을 이기고 근면,근검 ,절약으로 산 한평생을 돌아보며 30년을 넘게 산 미국에서 미국화되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한국 음식만 그립다는 사촌형 내외.
이제는 지난날 자기 희생을 훈장삼아 부디 건강하고 주님과 늘 동행하는 남은 삶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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