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아내의 친구

Jay.B.Lee 2017. 1. 5. 04:07





평택으로 출발하기로 약속한 날  가볍게 비가 뿌린다.

아내의 친구가 캐나다에서 왔다.

한국을 떠나 23년만의 첫귀국.

차를 타기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내손을 꼭 잡아주었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있던가

아내와 함께 평택 서탄면 작은  마을을 찾아 그녀의 시댁 집안 되는 분인듯한 집을 찾았다.

귀가 들리지 않는 노인은 그래도 눈치 것 알아 들었는지 우릴 데리고  선산에 해당하는 산소 있는 방향을  가르쳐주고 갔다.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아 남의 집앞과 밭을 통과 하는 동안 낯선이들이 반가우면서 두려운지  흰둥이 한마리가 꼬리는 흔들며  요란하게 짖었다. 

비석들을 세운지 몇년 되지 않았는지 거의 한꺼번에 새로한 검은 비석들이 반질 반질하다

비석에 새긴 망자 이름을 하나하나 보며 찾아 가자 마지막 묘지에서 그녀의 남편 이름을 찾았다,

봉분 잔디가 다 죽고 패여버려  황토가 들어난 낮은 무덤앞  묘비가 그녀의 남편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소식을 들은 건 토론토에서였다 .

그 때 그녀의 남편 나이가 서른 일곱 이었다고 했다 

시댁 종친들은 그녀의 한자 이름을 제대로 몰랐는지 비석에는 잘못된 한글 이름과 괄호안에  (이민)이란 말이 새겨넣었다.

 무덤 앞에서 혹시하여 내가 준비해간 성경책으로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성경 귀절을 읽어 주었다.

마른 체격이었다는것 외 얼굴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남편이다. 

송추 사슴농장에 작은 포니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놀러간 일이 기억난다. 

아내의 친구는 미쳐 생각 못햇다며 고맙다 했다.

아내의 친구에게 몇년을 함께 살았냐고 물어 보았다. 

10년 -고작 십년이었다.

남편과 산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라 했다.

이제 무덤에 와보니 기억이 조금씩 난다고 했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결혼한 딸과 사위가 혹 한국방문시 찾아 올 수 있도록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작은 딸을  결혼시켰고  큰 딸은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대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무덤을 뒤로 하고 내려오자 한번 더 보고 싶은 듯  그녀는 남편 무덤으로 쫓아 달려갔다. 

이제사 함께 살았던 시간이 떠오르며 그리움이,남편 없이 지난 고생스럽던  세월에 눈물이 치솟았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떠난후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캐나다 생활에 전념한 동안 그녀의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들은 백지가 되었다.

 

88년 난 한국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서 5년간 근무했다.

 우연히도 그녀의 오빠와 부모는 이미 캐나다에 이민해 살고 있었다.

93년 귀국 한해전  그녀의 부모가 Alberta 주 Edmonton 에서 Toronto로 이사 왔다는 얘길 들었다.

우리 부부는 집을 찾아 그녀의 부모앞에 큰절을 올렸다.

 그녀의 부모들은 오랫동안 보지 못한 불쌍한 홀로된 딸을 생각해선지  마치 딸인양 아내를 붙잡고 한참이나 울었다.


그녀와 아내는 여고 동창이다. 

친구인데다 우연히 그녀의 언니까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 우리가 캐나다로 주재차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

그녀의 남편은 독일계 외국회사에 다녔는데 오디오에 관심이 많아  있어 수시로 Trade하며 음악을 듣는게 취미였다.

그의 집에서 진공관 앰프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듣고 오면 우리집 거실의 Inkel  소리가 더 초라했다.

아내의 친구는 두딸을 두었는데 큰 딸은 지체 부자유아(뇌성 마비)로 태어 났다.  

머리는 완전히 정상이어서 말하기를 좋아해 늘 재잘대었고 내 딸과 가끔 잘 놀아 가족들과 함께 차로 놀러다니기도 했다.


우리가 93년 귀국하며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 돌아 왔을 때 해외에서 보낸 이삿짐은 거의 한달뒤나 도착 예정이었다.

가방 몇개만 가져온 우리. 

아이들은 학교를 가야했고 난 직장에 나가야 했다.

그 때도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착한 아내의 친구는 앉은뱅이 식탁부터 숫가락 그릇  심지어 TV까지 챙겨줬다.

 자주나오는 세탁물은 아내의 친구가 세탁을 해주었다.

아내는 그녀의 집에서 다리미질까지  해오곤 했다.

우리가 귀국한지 4개월이 지나 그녀는 자녀들과 같이 캐나다에 부모와 오빠를 만난다고 방문차 떠났다.

그곳에 실제 머물며 장애자인 딸의 교육을 위해 캐나다에 사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는지 이민 신청을 했다.

통상  오래걸리는 이민 수속인데 기이하게도  6개월만에 영주권을 받았다.

그녀의 가족이 이미 살고 있었고 직업도 유리 했겠지만 불쌍히 여긴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느낌이다.

남편을 잃고 딸만 둘 데리고 사는 여자. 

한 딸은 장애자.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갑작스런 이민 결정에 캐나다 살아본 경험 있는 아내가 친구 대신 그녀의 언니와 상의 하여 이삿짐을 선별하여 캐나다로 보냈다.

간간히 소식듣던  아내의 친구의 첫 방문으로 23년만의 상면이었다.

아내의 친구들은 수시로 그녀를 위해  모임을 가졌고 초대했고 그녀는 기쁘고 반가운 시간을 보낸셈이다,

어느 날 모임에 다녀온후 아내가 얘길꺼냈다. 

캐나다 귀국날은 다가 오고  남편의 무덤에 한번 가야하는데 어떻게 가야하는 지도 모르겠고 언니나 조카들이 누구하나 자기를 데려다 줄 형편이 않된다는 것이다.  

두말없이 내가 운전해 주겠다고  전화를 하라고 했다.

캐나다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요양원가기 직전이라는 근황을  차안에서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 늦은 점심으로 짐에서 가까운 하남시 " 고골"로 달려가 토속적인 점심을 대접했다. 

털내기 수제비, 코다리 찜,보리밥

아내와 친구는 얘기가 끝이 없었다. 

캐나다에 놀러 오라는 인사를 들으며 그녀를 언니의 집앞에서  내려주었다.

우리가 떠나온지  23년이 지난 토론토.  

우리가 언제 갈 수 있을지 ,그녀가 한국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서로의 약속들이 희미해지지않기를 기도하자.

이별. 

이틀후 그녀는 인천 공항이라며 탑승전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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