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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1762-1836) 생가 유적지

Jay.B.Lee 2015. 6. 8. 21:49

        

월요일 양수리 별장에서 사시는 권사님 댁에서 구역예배를 보러간다고  구역식구들을 태우고  양수리 까지 운전을 부탁한다.

나에겐 예배를 보는 동안  근처 정약용 생가 유적지가 많이 변했다고 다녀오면 좋을거라고 귀뜸해준다

지난 연휴에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 다산 초당을 다녀온 뒤여서 생가를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한 15년전인가 두번  다녀온 곳이다.

얼마나 변했을까 .

생가주변에는 기념관이 들어서고 주변 정리가 잘되었다.

다만 너무 잘 만들려고 애쓴 어색함이 조금 아쉽다. 

월요일이기도 하고  메르스탓인가  유적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조용하다.

무료 주차장이 한산하다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했어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집 문앞에  차로 막아놓고 당분간 휴업한다고 붙여놓았다.

메르스가 이곳까지 영향을 미쳤다.

다산 기념관과  주변 곳곳에 산재한 그의 글을 읽다보며 그의 생애,그의 사상,그의 업적이 한눈에 들어나 그곳의 자료들을 추려 정리해 보았다. 

다산이 자찬 묘지명(自撰 墓誌銘  )에 진술한 자신의 성격을  묘사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혈액형으로 본다면  A형에 해당되지않나 짐작해 본다.

 

조형물.-꺼지지 않는 불" 

똑 같은 내용의 설명문 두개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저술한 약 500여권에 이르는 서책과 그 속에 꺼지는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2011년 11월

 작품명"꺼지지 않는 불"

작가: 박철우

 

현주소:경기도 남야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의 글씨

우경 산수도 -다산이 그린 산수도

       

다산의 서체

 

 

         다산 사상의 핵심은 조선 후기의 사회 현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서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엇다.

정치 구조와 행정 체제,형률제도,경제제도,생산 기술,군사제도등 모든 영역에 걸쳐있다.

다산의 경세학은 일표 이서(一表 二書)로 요약된다..

바로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 심서(木民心書),흠흠 신서(欽欽 新書)이다.

<경세유표>에서는 조선의 전 국토를 도로망으로 연결하는 생활권으로 나누어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와 정전법(井田法)으로 구획된 농촌으로 구성하려는 거대한 국가 개혁론이 제시되어 있다.

<목민 심서>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들이 지켜야 할 기준을 확립히고 구체적인 사무를 제시하여 "자신을 다스리라"."공무에 봉사하라""백성르 사랑하라"는 세가지의 자세를 밝혔다.

또 <흠흠 신서>에서는 백성들의 생명을 소중히 하고 보호해야하는 역할을 밝히고 있다.-설명문에서

 

목민 심서 (木民心書)

-수령으로서 수행해야 할 일들을 이吏, 호 戶 ,예禮,병 兵,형刑, 공工의 육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전체 12부 중에서 앞뒤로 부임과 해임에 관한 2개부와 수령의 몸가짐에 관한 4개부가 있어 지방관의 도덕적 자세를 중시하였다.

현행법을 전제로 하는 행정 개혁 방안이다.

현재에도 목민관의 지침서로 절실하다.

 

흠흠 신서(欽欽 新書)

법제(法制)에 대ㅑ한 연구서이자 살인 사건의 실무 지침이라고 할수 있ㄷ.

형벌 규정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은 물론 중국 역대의 모범적인 판레를 선별하여 해설과 비평을 하고 있다.

관리들이 어떻게 살인 사건에 접근 해야 하는 지를 잘 살펴볼 수있다.

다산의 백성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경세유표(經世遺表)

관직 체계의 전면적인 개편,신분과 지역에 따른 차별없는 인재 등용,자원에 대한 국가의 관리,토지 제도의 개혁,부세賦稅 제도의 합리화,지방 행정 조직의 재편등 모든 제도를의 개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주례周禮의 육전 六典체제를 기본 체계로 하고 있다.

변법적 개혁을 통한 민생의 안정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의 실현이라는 다산의 꿈이 담겨있다.

 

다산의 실학 사상외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지은 것을 미루어   항시 앞을 내다보고 산 다산의 정신이 후세들에게 정말 귀감이 될만하다.

자찬 묘지명(自撰 墓誌銘)은 다산이 자신의 환갑을 맞이하여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다.

 

유명한 세밀화인 윤두서의 자화상-파격적인 자화상 그림외  다산의 외증조부란 사실이 흥미롭다.

恭齋 尹斗緖(1668-1715)

조선문인이며 화가

고산 윤선도의 넷째 아들에게서  태어나 장자인 자식이 없자  장자의 아들-종손으로 입양되었다.

정변으로 인해 46세에 해남 녹우당(현재 해남 윤씨 종택 이름)으로 귀향하여 2년후 사망.

48세에 사망했음에도 불구 슬하에 열명의 자녀를 둘정도로 다산가이기도 했다.

윤두서의 손녀가 나주 정씨 정재원에게 시집가 정약용을 낳음으로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된다.

 

다산의 분야별 사상

 

<교육사상(敎育思想)>

개혁은 치산 (발전)을 우히함인가 제산(평등)을 우히함인가 의 물음에 다산은 결론적으로 치산을 위함이라고 햇습니다.

현실적인 것을 연구하자는 실사구시( 實事求是),경세치용(經世治用)의 실학(實學) 교육을 주창,민생과 사회,국가에 도움이 되는 학문 교육으로 교육의 정도(定道)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문학 사상(文學思想)>

진실은 삶의 맥락에서 권력에 저항하고 핟대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때 아름답습니다.

참된 지식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기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사회의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경륜의 정신이 담긴 문학은  이세대의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과학 사상(科學思想)>

서양의 천문,지리,농사정책,수리기술,측량법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문을 연구 하기로 하였습니다.

과학이 민생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아야 한다는 실용론을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거중기,프리즘,종두법을 발전시키는 등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오늘날 과학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사회 사상(社會 思想)>

 

 

<경제 사상(經濟思想)>

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 강병을 제시하고 농업 생산성제고를 위한 여전제,정전제를 제안,토지 공개념을 도입하고 조세 부담의 공평성을 기하는등 능률적인 경제운영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정치 사상(政治 思想)>

임금은 백성을 위하고 (爲民 思想),군자는 자신을 바로 세운후 에 남을 다스리는 (修己治人)정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선생의 정치 사상은 오늘날 지도자가 걸어야할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유당(輿猶堂)

 

생가 여유당(與猶堂)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 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으로 집앞으로 내가 흐르고 집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이라고 표현하였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1800년(정조 24년)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謨)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은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것도 참으로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있어 개운치 않으면 그만 두지를  못한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 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먹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겟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리.

 

노자의 말에 '여(與)여,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깍는 듯 할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해낸지가 6,7년이아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보고 그만두어 버렸다.

초천(蕉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서 파가지고 문미(門梶)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배경 설명문에서

 

 

 

 

 

 

거중기(擧重機)

1792년(정조 16년)정약용이 서양의 기술 과 도르래의 원리를 참고로 하여 만든 기구로 1796년 화성(수원성) 성곽을 쌓는데 이용했다.

높이 4.4미터 너비1.7미터

도르래로 두사람이 10 이상의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이 가능했다.

거중기이외에 한강을 건널때 사용한 " 배다리"를 재현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