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유럽 가족 렌트카 여행

유럽 렌트카 여행기

Jay.B.Lee 2009. 2. 11. 09:28

 

 

 

  

 

 

1991년 여름 휴가.

노동절휴가를 더하면 10여일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여행사를 통해 토론토 -암스테르담  왕복표를 예약해 두었고 렌트카도 예약했다.

 Fax로 보내온 각종 자동차의 제원을 보며 오토,에어컨이 들어 있는 차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유럽차는 에어컨이 없었다.

간신히 선택한 것이 피아트1600CC

새벽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 ,봉투에 이름이 적힌 미리 준비된 키를 받아들었다.

차 계기판을 들여다 보니 주행거리 12,000키로였다

일단 암스테르담 공항을 빠져 나와  독일 국경을 넘기전 휴게소에 들려 잠시 눈을 부쳤다.

한밤인 토론토의 시간으로 시차를 이겨야 했다. 

묵직한 잔에 커피를 마셨다.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는 환경보호주의자들.

BMW 모터 사이클을 탄  떼거리로 검은 게르만의 후예들인 거인들이 빠져 나간후 우리도  출발 준비를 했다.

서점에서 사놓았던 도로망 중심의 큰 유럽 지도가 유일한 안내서였다.

북미를 자동차 여행 할 때와  다르게 처음으로  숙소 예약 없이 나선 여행이다.

유럽의 고속도로는   한장의 지도로는  자동차 주행거리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8월 여름의 끝이어서 숙소잡기가 쉬울 것이란 예상하에 적당한 곳에서 숙소를 잡기로 했다.

욕심을 줄이고 또 줄여 선택한 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토론토-암스테르담-하이데르베르그-짤스브르그(모자르트가 태어난 생가를 아이들과 함께 꼭 보고싶었다)-베네치아-로마-피사(아이들에겐 두모의 사탑이 흥미로워 할것 같아)-스위스 루체른-인터라켄-베른-파리--(벨기에)-암스테르담-토론토.

처음 달려본 독일의 아우토반 .

"뺑"-총알처럼 스쳐가는 자동차들의 공기 파열음이 대단했다.

백 미러에 점이 보이는 순간 총성처럼 지나간다.

시속 150키로로 달리며  제일 끝차선만 이용했다.

하이데르 베르그를 관광한다음 어두워지기 직전 까지 달렸다.

도로에서 같은 명칭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지명아닌  Exit을 의미한다는 것을 빨리 눈치 채었다.

 독일 을 못 벗어난채  Exit으로 빠진 다음 시골 마을로 접어들었다.

4키로 전방에 호텔이 있다고 마을 젊은이가 알려주었다.과연 독일인이었다.

쭉 가면 나온다는 한국식 대답에 비해 얼마나 명확한가.

4키로를 달려  발견한 호텔은 굳게 문이 잠겼고 작은 마을의 거리에는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 지나는 할아버지 한분을 발견.그러나 영어가 통할리 없다.

바디 랭귀지로 두손으로 머릴대며 잠잘곳을 찾자 따라 오라며 10여미터 앞의 작은 호텔(장급)로 안내해 주었다.

작은 로비에는 색바랜 사진같은 TV를 두 노파와 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신이 났다.

손님 하나없는 날 동양 인 가족이 들어서자 어두운  로비에 활기가 돌았다.

아낄 것을 아껴야지 정말 독일인들이란 .

제대로 짐을 들고 다시 찾아 왔는지 빼꼼히 들려다 보고 가던  처음 만난 할아버지.

자상한 친절에 감사했다.

새벽에 떠나야 하기 때문에 아침을 먹을 수 없고 미리 숙박비를 지불하겠다고 하자 영어를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잘도 알아 듣고 숙박비에서  빼준다고 종이에 가격을 다시 써주었다.

독일인들은 항상 명확하다.

아침 식사는 숙박비에 포함 ,먹으나 않먹으나 똑 같다는 숙소들도 많이 보아 왔으니까.

 커다란 구멍이 있는 놋쇠 열쇠를 받아들고 화장실 달린 방에 들어서자 19세기의 가구와 방을  보는 것 같았다.

이른 새벽 할아버지가 열쇠를 놓고 가란 자리에 놔두고 도망자처럼 살며시 호텔을 빠져 나와 캄캄한 도로를 서서히 달렸다.

고속도로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하나.

멀리 버스 정류장에 사람  몇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구텐 모르겐. Do you speak English?"

"?"

"아우토반 ,This way ,that way?"

내손으로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가던 방향과 뒷방향중 가던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당케"

30여년전 배운 다잊은 독일어중  평생 처음 두 단어를 사용해본 순간이었다.

잘스 부르그에선 주차장이 있는 변두리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이태리산 Fiat는   당시 DOHC엔진으로 힘이 배기량에 비해 좋으나 소리가 요란해서 일반 도로에 서행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워낙 작은 짤스스부르그라 모자르트 생가,미라벨 궁전,성채,골목길 모두  걸어 돌아 다녔다.

'Sound of Music"촬영 장소 투어는 도저히 시간이 안되는 아쉬운 여행길 .

모자르트 초코렛이 상점마다 가득한  짤스부르그다 .

유럽의 3대 아름다운 도시중 하나로 꼽히는 이도시는 모자르트에게 너무 신세를 졌다.

여름의 음악회와 더불어  영원히 모자르트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사는 도시였다.

짤스부르그에서   잘스부르그 교향악단의 모자르트 연주곡 CD를 기념품으로 챙겼다.

 오스트리아 를 벗어나 이태리 로 향하며 산과산을 이으며 높은 골짜기에 놓인 다리를 달렸다.

 바람이 어찌 세찬지 자동차가 흔들거려   내가  나이아가라 에 오가는 길에 높이 솟아 하늘로 달리는 듯한 다리에서  겪은 경험이 없었다면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태리 국경에는 국방색군복을 단정히 입은 군인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이던 2차대전 당시부터 입었던  군복과  별차이가 없었다.

"South Korea?"

 여권을 받아든 신참이 고참을 향해 물었다.

고참이 고개를 끄덕이며 North Korea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북한은 안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인상 좋은 군인에게 이근처 호텔을 물어보았다.

가르쳐준 옆길로 나가자  산아래로 내려간 작은 언덕위에 펜션이 있었다.

처음 묵어 보는 펜션 .

검은 나무 침대가  네개로 좌로 횡으로 놓여 있어 가족이 묵어가기에 알맞게 되어 있었다.

모두가 새것이었고 청결상태가 아주 좋았다. 가격도 북미에 비해 비슷한 수준이고.

새벽 일찍 떠나려는 길가 우리차 앞뒤로 어제는 없던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새벽의 운전은 많은 능률을 올린다.

상쾌한 아침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고 가족들은 다시 아침 잠에 빠질수가 있어 좋았다.

새벽에 달려  아침 나절 도착해야 목적지를 보고 또 떠날수 있어서였다.

북미에선 지도를 보며 친절한 " 네비게이터"역할을 하던 아내도 한장자리 큰 유럽지도 앞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햇다.

분명히 베네치아 도로 사인을 보고 들어선길이 표시 거리를 지났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인적 없는 길에서 간신히  자동차를 한대 만나 베네치아를 묻자 그들은 내가 이태리 말을 못알아듣는 것을 알자 곧장 따라오라고 앞장을 섰다.

5분여 달려  왼손으로 손짓을  하며 그 쪽으로 가라고  손을 흔든다.

"그라시아스".

 손을 흔들어 그들의 친절에 답했다.

 우리 때문에 분명히 길을 돌아 간 것이 틀림 없는 사람들.

 사실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헤메고 있는 불쌍한 여행자를   보고 그저 가버린다면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베네치아.

주차장 표지가 너무 반갑다.

아내에게 "카메오"를 사주는 대신 모두 곤돌라를 타기로 했다.

안사람은 쉽게 감격하는 타잎이어서 지금도 베네치아의 즐거웠던 순간을 얘기한다.

마르코 광장의 살찐비들기.곤돌라,

아들에겐 007영화의 수륙양용의 차가 상륙하고  인디아나죤스에 나오던 마르코 광장이 모두가 허구의 장소임을 알아가는 시간의 여행이었다.

베네치아 여행 을 마치고 주차장에 온뒤 주차권을 분실한 것을 알았다.

씩씩대는 주차요원에게 여권과 연락처등을 기재해주고 간신히 주차장을 나왔다.

네델란드 차량번호와 가족을 보며 적어도 차량도둑이 아님은 믿어주었다.

로마로 향하는 한밤의 고속도로에는 트레일러들이 많이 다녔다.

로마에 거의 이르러 모텔 사인만 보고 무조건  들어간 변두리 모텔.

주차장엔 20여대의 고급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우리에게 안내해준 방은 로비에서 한참 떨어져 어둠 침침한 복도를 지나  있는 가족용 방이었다. 

정원은 손을 전혀 보지 않아 잡초가 키만큼 자라 있었다. 이태리 마피아들이 나옴직 스러운 분위기였다.

으시시하고 무시무시한 모텔.

문을 잠그고도 문앞에 책상과 탁자를 쌓아 경보장치를 해 놓았다.

아침 모텔을 나올때는 어제 저녁 있던 고급 대형 승용차 벤츠들이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마피아들의 회합이 있었나.

로마 시내 까지 차를  몰아 교통순경이 있는 네거리 무료 주차장에 일자주차를 했다.

렌트차가 비교적 새차여서 신경이 쓰였다.

 렌트카 회사의 안내문에는 이태리방향의 여행자에게 고급 승용차는 대여를 금한다는 귀절이 있어서였다.

도난 보험에도 가입해 놓았어도 차를 도난 당한다면 여행은 망치는 것이다.

여권과 항공권과 카메라만 달랑 몸에 지니고 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로마 중앙 터미날의 경찰들은 환전소를 묻는 나에게 튜니지아계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했다.

버스표 팔던  매표소 앞면에는소매치기들이  새빨갛게 화살표로 옷의 이곳 저곳을  뒤져가는 흉칙한 그림이 있었다.

소매치기 반 ,관광객 반이라는 로마.

시내 버스로 돌아다니는 동안 소매치기는 보지 못했다. 

2006년, 다시 테르미날 역에 섰을 때 너무 변해 옛모습을 상상키 어려웠다. 

로마를 3일 보고 어떻게 로마를 얘기한단말인가 외치던 이태리 청년의 기사를 읽고도 부끄러움은 접은 채 로마를  하루 돌아보고  떠나야 했다.

다행히 차는 찌그러진 차들 사이에서 얌전히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마다 커피를 주문하면 카페?하며  에스프레스를 주어 처음 마셔보았던   에스프레소.

운전에 도움이 되어 마시기시작 한 것이 이젠 기회만 있으면 마시게 된 계기가 되었다.

피사를 앞두고  발견한 넓직한 주차장이 있는 시골 호텔에 묵기로 했다.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시간 .시골길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기울어져 가는 사탑(Leaning Tower)을 물었다.

기울어진  내손을 보고 "아,두모"하며 환하게 웃으면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붕괴를 막기 위해 공사중이었던 사탑 .

스위스로 향하여 달리며 산자락과 산자락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에서 수십개의 작은 터널을 지났다. 

좌측으로 보이던 지중해의 푸른 빛도 잠시 길고 긴 스위스의 터널에 들어갔다.

장장 14키로의 터널 도로.붉은 불빛에 최면 당하듯 빨려들때간신히  터널을 벗어낫다.

루체른(Luzern)에 이른 것이다.

루체른에을 떠나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몇개의 인타라켄을 알리는 불빛사인이 계속 방향을 가르키며 껌뻑 거렸다.

 만약 놓치게 되면 긴 터널을 계속 달려야하는 비참함을 고려한  배려의 표시다.

인터라켄에 도착,클래식한 욕조가  달린 고급 호텔에 묵기로 했다.

그동안의 피로로 가족에게 편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저녁 기념품점을 돌아보고 스위스 방문기념으로 Army Knife와 뮤직 박스 하나를 샀다.

숙박비에 포함된 아침 부페.

아침으로 먹은 빵,요구르트,우유-북미에서는 도저히 맛볼수 없는 맛이었다.

지금도 스위스하면  음식이 좋았다고 아내도 얘길 하곤 할 정도였다.

아침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관계로 시계가 나빠 융프라우 오르는 것은 포기하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007에서 숀코네리가 스키타던 곳이라고 일러주고 싶었는데.

스위스 톨게이트의 아가씨가 뭐라는 데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일회용보다 한달간 무제한으로 다닐수 있는 통행료가 훨씬 싸다는 것이다. 

어디인지 스위스면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주유소에서 무료 에어 펌프를 발견하고  타이어 압력을 조정했다.

아무래도 휠얼리어먼트가 안된차여서 계속 한쪽으로 쏠려 운전대를 잡고있는 팔이 피곤했다.

왜 캐나다에서 피아트가 실패하고 돌아갔는지 짐작이 갔다. 

잘 만든 스위스의 고속도로 표지판을 따라 프랑스 방향으로 달렸건만 금새 독일이다.

휴게 장소 잔디밭에서 만난 노 독일인 부부가 영어가 유창했다.

그들의 친절로 프랑스방향 도로를 타고  언덕을 넘고 넘어 파리에 입성하는 기분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사전에 프랑스 로타리 운전 방법을 알고 온것이 도움이 되었다.

오페라 하우스 까지 들어가 부근 지하 차고에 주차를 했다. 

주차비가 비싸도 걱정없이 잠을 자고 싶었다.

 뒷골목 의 아담한 호텔,영어가 서투른 흑인 종업원이 방이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그때는 불어하는 흑인이 왜 이상해 보였을까.

우리가 너무 피곤해 방이 작아도 괜찮다고 하자 그럴수 없다며 사장을 부른다.

젊은  사장이 나와 우리를 훓어보더니 넷이서 잘 수가 없는 것이 규칙이라며 대신 특별히 방하나를 내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한밤에 올라간 에펠탑.

에펠탑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다음날 아침 개선문,노틀담 성당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르블 박물관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다.

몇몇 작품과 한국인이 좋아하는 모나리자 앞에서 발도장을 찍었다.

여행의 막바지. 빠리를 빠져나가 암스테르담 행 고속도로를 타야했다.

좌측 램프를 타야하는 데 실수로 우측램프차선에 섰다가 수신호로 천천히 움직이자 차들은 서행해주며 우리가 고속도로 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갈수 있도록

참아준 운전자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사람들이다.

암스텔담의 유난히 큰 노란 번호판이 파리가 초행인 촛자 운전자임을    금방알았으리라.

제대로 고속도로를 타자 벨기에는  생략하고 암스테르담 공항으로 직접 가기로 했다.

공항 근처에서 기름을 가득 채워주고 차량을 반납하자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직원에게 차량의 상태를 설명하고 고쳐서 렌트카로 사용하길 부탁했다.

밀려드는 피로감에 빈방이 있는 공항근처 호텔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침대 세개에 보조 침대 넣어준다며 숙박료가  U$350이라고 알려주었다.

새벽 네시 반 출발인 Charter 비행기를 타려면 잠잘 시간이 겨우 네시간 반 밖에 여유가 없다 .

그냥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돈으로 토론토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편이 낫겠다는 아이들의 얘기였다.

암스테르담 스폴키 공항의 지하층 라커는 족히 관을 두개쯤 넣어도 될만큼 크다.

일단 짐을 보관한 다음 공항 지하도와 연결된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역에 내려 중앙로를 걸었다.

 역에서 멀지 않은 밤 거리는 아이들에게 별로 교육적이 못되었다 .

아이들이 보기에 기이한 사진으로 만든 엽서,마약쟁이 같은 사람들.이상한 차림의 여인들.

공항으로 돌아오자 찾아간  긴 의자가 있던 명당자리엔 이미 배낭여행객들이 잠자고 있었고 우린 공항 대합실의 의자에 앉아 졸며 잠자며 윈드자켓을 입고도 에어컨  추위와 싸워야 했다.

기내에선 풀어진 긴장감으로 내내 잠만 자고 왔다.

가족을 이끌고  안전하게 다녀온 가장의 단잠이었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몇년전 부터 유럽 렌트카 여행 안내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부터 18년전 ,렌트카 여행을 시도한 젊은 날의 정열이 있었다는 것 .

열정적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는 것으로 나에겐 의미있던 시간이었다

모두가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남은 사진들만이 말한다.

역시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고.

사진속의 아내, 아이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젊은 날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